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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죽게 놔둬
서지안은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씁쓸함을 억지로 삼키고 사무실 통창 밖을 내다봤다.
화창한 날씨 아래, 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경성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문득, 경성에서 이름을 날리는 서한 법률사무소가 처음에는 작은 사무실 하나로 시작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자신의 명의로 된 유일한 집을 팔아 허준혁이 사무실을 임대할 수 있도록 도와줬던 날이었다.
이제는 이 건물 한 층 전체가 허준혁의 것이 되었다.
사무실을 계약하던 날도 오늘처럼 맑은 날씨였다.
"우리 사무소 이름, 서한으로 할까?"
"뭐든 상관없어. 네가 정해." 허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서지안이 설레는 마음으로 그의 품에 안기자, 그는 그녀의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몸을 떼어냈다. "난 누가 안는 거 싫어."
그래도 서지안은 해맑게 웃으며 다시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래도 난 안을래."
그녀는 한때 호기롭게 말했다. 반드시 그를 경성에서 가장 잘나가는 변호사로 만들어 주겠다고.
허준혁은 대수롭지 않게 상관없다고 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건 언제나 그녀의 행복이었다.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그는 지키지 않았다.
얼마 후, 서지안은 사무실에 쌓인 짐을 정리하느라 반나절이 지나도록 손을 놓지 못했다.
회사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늘 허준혁의 뒤에서 방향을 잡고 문제가 생기면 조용히 수습해 왔다.
회사는 그의 이름으로 운영됐지만, 동시에 그녀의 피와 땀이 스며든 곳이기도 했다.
직원들은 서지안이 짐을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아무도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결혼식에서 벌어진 일을 이미 들은 눈치였지만,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
허준혁은 그들의 사장이었고,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 불이익이라도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서지안이 모든 짐을 정리한 뒤 이삿짐센터에 연락하려던 순간, 휴대폰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허준혁의 어머니가 건 전화였다.
서지안은 입술을 꼭 깨물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서지안 씨 맞으세요?" 전화를 받자마자 휴대폰 너머로 가정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 씨가 전화를 안 받아요. 부인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병원으로 모셨습니다. 지금 바로 오실 수 있으세요?"
"네, 지금 바로 갈게요."
서지안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허준혁의 어머니 왕미정은 병상에 앉아 가정부가 깎아주는 사과를 먹고 있었다.
그녀가 병실에 들어오는 것을 본 왕미정의 창백한 얼굴에 초조함과 분노가 번지더니 바로 그녀를 꾸짖었다. "서지안, 너 준혁이랑 어떻게 된 거야? 결혼 같은 큰일을 두고 이렇게 제멋대로 굴 수 있어? 결혼식 당일에 취소라니, 이 소문 퍼지면 얼마나 창피한지 알기나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지안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래도 왕미정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일 기력이 있는 걸 보니 당장 큰일은 아닌 듯했다. 아마 결혼식 취소 소식을 듣고 화가 치밀어 지병이 도진 모양이었다.
"어머님, 일단 진정하세요."
"내가 어떻게 진정하니?" 왕미정은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준혁이 원래 고집 센 거 알잖아. 너라도 말렸어야지. 어떻게 걔가 저러는 걸 그냥 둬?"
서지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차분히 설명했다. "저희가 결혼식 올릴 때, 진유나 씨가 투신했어요."
"뭐라고?" 왕미정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유나 괜찮니?"
"네, 괜찮아요. 준혁이가 병원으로 데려갔어요."
왕미정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큰일 안 나서 다행이네."
사정을 듣고 나서야 안심한 왕미정은, 허준혁에게 폐가 가지 않도록 결혼식 취소 뒤처리를 깔끔하게 하라고 서지안에게 당부했다.
반나절 내내 속을 태운 탓인지 기력이 떨어진 그녀는 곧 잠이 들었다.
"서지안 씨, 죄송해요. 제가 부인님 곁에 있을게요. 바쁘신 일 보세요." 가정부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서지안은 병상에 누워 잠든 왕미정을 잠시 바라봤다. "앞으로 어머님 일로는 저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저는…"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가정부가 급히 말을 이었다."서지안 씨, 화 푸세요. 아까 부인님께서 하신 말씀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부인님 원래 성격이 그러세요. 진유나 아가씨는 어릴 때부터 거의 직접 키우다시피 하셨잖아요. 그래서 더 편을 드시는 거예요. 그래도 부인님, 서지안 씨도 정말 좋아하세요…"
서지안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가정부 눈에도 보일 정도구나. 어머님이 누구를 더 아끼는지.'
"어머님께 화난 거 아니에요. 저, 허준혁이랑 헤어졌어요. 이제 그 사람 일은 저랑 상관없어요. 어머님 일은 직접 허준혁한테 연락하세요."
말을 마친 서지안은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 뒤에서 가정부가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게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허준혁과 진유나가 눈에 들어왔다.
서지안은 허준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몇 번을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얼굴이었다.
'그래… 저 얼굴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빠져들 수 있었을까?'
"왜 결혼식 취소에 대한 여론을 빨리 처리하지 않아? 전화가 다 나한테까지 오고 있어." 허준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지안의 가슴이 시큰하게 저려왔다. '허준혁은 정말 나를 좋아한 적은 없구나.' 그는 결국 자신의 뒤를 정리해 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서지안은 바보처럼 그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모든 행동을 자신을 좋아한다는 증거로 믿어 왔다.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 아름다운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 기억들만큼은, 서지안에게 여전히 가장 소중한 시간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억이 있었기에, 서지안은 끝까지 이 사랑을 놓지 못하고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끝내야 했다.
"지안 언니, 오늘 정말 미안해요. 언니랑 준혁이 결혼식 망쳐서… 제가 사과할게요." 진유나는 조금도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며 허준혁의 팔짱을 꼈다. 이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준혁아, 나 사과했으니까 이제 화 풀 거지…?"
"응." 허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서지안을 흘끗 바라봤다.
서지안은 차갑게 그녀를 응시했다. 진유나는 이런 얄팍한 수법을 늘 써왔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맞서 싸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서지안은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회사에 아직 정리할 짐이 남아서, 먼저 갈게."
허준혁과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서지안이 뒤를 돌아보자 허준혁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할 말이…"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진유나가 갑자기 휘청이며 허준혁의 품으로 쓰러졌다.
허준혁은 재빨리 그녀를 끌어안고 다급하게 물었다. "왜 그래? 괜찮아?"
"나…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수혈받은 지 오래돼서 그런가 봐…"
'수혈'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서지안의 몸이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
진유나는 선천성 조혈 장애를 앓고 있어 일정 주기마다 수혈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RH-혈액형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서지안 역시 같은 혈액형이었다.
어릴 적, 처음으로 수혈을 해주겠다고 나섰을 때만 해도 진유나가 허준혁의 사촌 여동생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 이후에도 허준혁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여러 번 수혈을 해줬다.
그때의 그녀는 참 어리석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끼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아껴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몇 번이나 했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허준혁은 무의식적으로 서지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안아, 준비해. 이따 유나한테 수혈해야 하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허준혁이 자신과 함께한 이유가 단순히 곁을 지켜 줄 사람이 필요해서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어쩌면 진유나를 위해 언제든 불러 쓸 수 있는 '이동식 혈액팩'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싫어!"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허준혁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유나 상태 특이한 거 알잖아. 지금 당장 수혈 안 하면 죽어."
"그럼 그냥 죽게 놔둬."
챕터 목록
총 26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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