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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이혼 합의서 사인

정서윤은 클럽의 프라이빗 룸에 몸을 기대고 앉아 알록달록한 칵테일을 연달아 들이켰다. 한 잔, 또 한 잔. 달콤하면서도 묵직한 술맛에 정서윤의 얼굴은 금세 붉게 달아올랐고, 눈빛도 술기운에 흐릿해졌다.

정서윤은 곁에 둘러앉은 남자들을 살폈다. 어리고 잘생겼고 몸매도 패션 잡지 속에서 튀어나온 듯 흠잡을 데 없었다. 그런데도 가슴은 공허했고 묘한 슬픔이 그녀를 짓눌렀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자꾸만 빌어먹을 남편, 최연우 생각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정서윤은 손목을 들어 다이아몬드 팔찌를 흔들며 말했다. "오늘 밤, 나를 제일 즐겁게 해주는 사람한테 이거를 줄게." 정서윤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2000만 원짜리야."

그 팔찌는 최연우가 준 선물이었다. 한때는 소중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이제는 팔찌도, 그 팔찌를 준 남자도 필요 없었다.

남자들은 곧바로 달라붙었다. 한 명은 그녀의 뒤에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고 또 다른 남자는 그녀에게 바짝 붙어 귓가에 달콤한 말들을 속삭였다. 세 번째 남자는 복근과 가슴 근육을 자랑하듯 셔츠를 젖히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한 명이 좀 더 대담하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누나, 내가 혀로 하는 건 뭐든 자신 있거든. 한번 경험해 볼래?"

정서윤이 나른하게 웃었다. "그래. 좋아." 그는 강아지 같은 눈을 가진 순한 인상의 남자였다. 날카로운 이목구비에 차가운 눈빛이라 다가가기 어렵게 보이던 최연우와는 정반대였다. 최연우와는 충분히 오래 살았다. 이제는 새로운 맛을 봐도 될 때였다.

정서윤은 팔찌를 풀어 남자에게 망설임 없이 건네주었다. "너 가져. 이제 네 거야."

남자가 입을 맞추려 다가오자 정서윤도 미소를 지으며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입술이 닿기 직전, 낯익은 팔이 불쑥 뻗어 그녀를 낚아채 가슴팍으로 끌어안았다.

익숙한 향이 코를 찔렀다. 깨끗하고 차가운,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사람의 냄새였다. 정서윤은 굳이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놔." 그녀는 술기운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 키스도 못 했는데."

최연우의 팔은 더욱 단단히 조여왔다. "그만해."

정서윤의 주변에 있던 남자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야, 당신 누구야?" 한 명이 소리쳤다. "우리 손님을 왜 뺏어?"

최연우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꺼져."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기세에 누구도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남자들은 황급히 짐을 챙기며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 최연우의 시선이 한 남자의 손에 채워진 팔찌에 닿았다.

"잠깐." 최연우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팔찌 내놔."

남자가 어리둥절한 듯 팔찌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근데, 이분이 직접 주신 건데요?"

최연우는 믿기 힘들다는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분명히 그 팔찌였다. 그 팔찌가 정서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정신이라면 정서윤이 결코 다른 이에게 내줄 리 없었다. 그녀가 취한 틈을 타 빼앗아 간 것이 틀림없었다.

"내놔." 최연우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렸다.

잔뜩 겁을 먹은 남자가 더 말을 얹지 못 하고 팔찌를 건넸다.

술에 잔뜩 취해있는 정서윤은 다시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가지 마!" 정서윤이 몽롱한 목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혀로 하는 건 다 잘한다며.. 아직 안 해봤잖아."

정서윤은 최연우의 품에서 버둥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정을 부렸다. 그때, 최연우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고 정서윤은 한순간에 잠잠해졌다.

집에 돌아온 최연우는 정서윤을 문 쪽으로 부드럽게 밀어붙였다. 헝클어진 머리에 초점 없는 눈, 술기운에 붉어진 얼굴까지 엉망이었다.

최연우는 조용히 팔찌를 다시 그녀의 손목에 채워줬다. "차고 다녀. 앞으로는 집에 자주 들어오도록 할게."

정서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결국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내가 화를 낸 이유가 단순히 집에 잘 안 들어와서라고?'

정서윤이 몸을 빼내려 했지만 최연우가 다시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품에 안긴 정서윤은 뻣뻣하게 굳은 채 잔뜩 긴장해 있었다.

최연우가 천천히 다가왔고 두 사람의 입술이 거의 닿기 직전이었다. 정서윤은 문득 낯선 향이 콧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다른 여자의 향수였다. 정서윤은 눈을 번쩍 뜨며 그를 밀쳐내고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날 건드리지 마."

그녀는 문득 밀려오는 역겨움에 한달음에 화장실로 달려갔다.

최연우는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은 채 그녀의 뒤에 있었다. 그는 곧바로 욕실로 따라 들어가 그녀의 머리를 잡아주고 등을 쓸어주었다. "많이 힘들어?"

정서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최연우의 전화가 울렸다. 휴대폰 화면에 서민지의 이름이 뜨는 것이 보였다.

최연우는 전화를 받으며 화장실을 나갔다가 잠시 후 자켓을 챙기며 돌아왔다. "회사에 일이 생겼어. 나가봐야겠다."

'회사 일?' 정서윤은 화장실에서 걸어나오며 시계를 흘끗 봤다. 새벽 세 시였다. 이 시간에 무슨 업무 전화가 올 리 없었다. 답은 하나,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것뿐이다.

정서윤의 술기운이 단숨에 가셨다. "잠깐만. 어머니가 이 서류에 사인을 좀 해 달라고 하셨어." 그녀는 서랍을 뒤져 서류 뭉치를 꺼내 건넸다.

최연우는 서류를 대충 훑어본 후 이름을 휘갈겨 쓰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사실 그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맨 아래에 끼워져 있던 것이 이혼 합의서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서민지가 갑작스레 복통을 호소하는 바람에 최연우는 급히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갔고 아침까지 곁을 지켰다.

최연우가 집에 돌아왔을 땐 정서윤이 어젯밤 옷차림 그대로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최연우는 정서윤을 잠옷으로 갈아 입히고 식탁 위에 해장국을 올려둔 뒤 조용히 출근했다.

몇 시간 후, 정서윤은 머리가 지끈거려 잠에서 깼다. 최연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좀 괜찮아졌어?]

정서윤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거실로 나가니 식탁 위에 해장국이 놓여 있었다. "고마워요, 순희 이모."

가정부 오순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모님, 그건 최 대표님이 직접 준비하신 거예요."

정서윤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최연우는 연애할 때도, 결혼하고 나서도 늘 다정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다정함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 다정함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서민지와 닮은 얼굴 때문이었다. 최연우가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는 언제나 서민지뿐이었다.

정서윤은 조심스레 해장국을 몇 숟가락 뜨다가 그릇을 내려놓았다. "순희 이모, 치워주세요."

정서윤은 곧바로 이혼 합의서를 챙겨 들고 임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부동산 명의 이전 준비하세요."

임서연의 들뜬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연우가 사인했니?"

"네." 정서윤은 잠시 멈췄다 말을 이었다. "가족들한테 이혼 사실은 한 달 뒤쯤 알리는 게 좋겠어요. 그때 집에서 나올게요."

한 달이 필요했던 이유는 다가오는 최연우의 할머니인 최정숙의 생신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최씨 가문에서 정서윤에게 가장 따뜻하게 대해 준 사람이었기에, 그녀는 할머니가 기쁘게 칠순을 맞이하길 바랐다.

정서윤이 전화를 끊자, 휴대폰에 뉴스 알림이 떴다. <성신 테크, 파산 위기설>

성신 테크는 정서윤이 대학 시절 직접 설립한 회사였다. 여성용 호신 제품을 전문으로 하며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던 기업이었다.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그녀는 모든 걸 내려놓았다. 꿈도, 미래도, 자신까지도. 그녀는 사랑 하나에 전부를 걸었고, 모든 것을 최연우에게 내맡겼다.

뉴스 헤드라인을 읽은 정서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옷을 갈아입고 예전 동업자였던 곽도현을 만나러 나설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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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목록

총 135장

  1. 1장제1화 남편이 첫사랑을 호텔로 데려갔다
  2. 2장제2화 이혼 합의서 사인
  3. 3장제3화 다른 여자를 집에 데려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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