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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남장을 한 모녀
5년 후.
중삼계(中三界), 신족(神族) 룡연행궁(龍延行宮)의 처소(臥房).
연소연의 눈에 한 남자의 윤곽이 은은하게 아른거렸다. 거칠게 몸을 부딪쳐 오는 남자의 품 안에서 그녀는 마치 물을 찾아 헤매는 물고기처럼 몸부림쳤다.
남자는 그녀의 몸을 애틋하게 감싸 안은 뒤, 그녀와 뜨거운 밤을 보낼 태세를 하고 있었다.
귓가에 남자의 부드러우면서도 끈적한 목소리가 여전히 맴도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 혼례를 올리면..."
남자의 말에 눈을 부릅뜬 연소연은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건 헌원우의 음험하고 무정한 얼굴이었다.
'죽어!'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낀 연소연은 당장에 몸을 일으키고 손을 번쩍 들었다.
쉬익!
소매 안에 숨긴 화살이 빠른 속도로 발사되더니 그녀의 맞은편 기둥 벽에 강하게 내리 꽂혔다.
이제 더는 쓰레기만도 못한 그 남자의 모습이 연소연의 눈앞에 아른거리지 않았다.
더구나 그녀의 눈은 보이지 않았는지 오래기 때문에 무감한 의안을 감추기 위해 잠잘 때조차 특수 제작한 은봉 가면을 착용한다.
악몽이었다는 걸 자각한 뒤에야, 연소연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두 눈을 의식한 그녀는, 5년 전 입었던 중상을 떠올렸다. 그날의 사고로 인해 무려 3년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했었다. 만약 그녀가 운 좋게 천결성(千絕城)에 가지 않았다면, 만약 그녀가 의술과 독술에 능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병이 나은 뒤, 그녀는 사람을 시켜 아이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결국 끝내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지난 2년 동안 그녀는 아이의 행방을 수소문하며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제 동술(瞳術)은 어느 정도 익힌 그녀는 물체를 또렷하게 알아볼 수 없으나 색을 구별하고 인물의 윤곽과 세부적인 형체를 그릴 수 있어, 기본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영존(靈尊) 9단의 경지에 이른 연소연은 중삼계에서 고수라 불러도 손색없는 실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창란대륙에서 무사의 계급을 낮은 급에서부터 나열한다면, 영자(靈者), 영시(靈士), 영사(靈師), 영장(靈將), 영존(靈尊), 영왕(靈王), 영황(靈皇), 영제(靈帝), 영신(靈神)이다. 일반적으로 처음 세 경지는 하삼계 영장으로부터 중삼계까지 활동할 수 있으며, 영황이면 신마급 상삼계 강자로 될 것이다.
지금의 연소연은 원래 몸의 주인보다 두 단계 높은 경지(境界)에 이르렀다. 비록 아직 21세기의 영황급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헌원우와 연소진 같은 영장 이하의 졸개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이번 기회에 룡연행궁을 지나 하삼계(下三界)로 가려는 까닭은 다름 아닌, 자신의 눈을 되찾기 위함이다. 만약 눈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면 아들의 행방 또한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빛의 강약에 근거하여 연소연은 아직 어둠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조금 전 그녀의 다소 과한 움직임 탓에, 곁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어린아이가 그만 잠에서 깨어났다.
남자아이와 다를 바 없는 차림새의 어린 소녀는 채 네댓 살쯤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살이 오동통하게 오른 볼과 맑게 빛나는 눈동자는 마치 호수를 그대로 담아낸 듯했고, 그 깊고 투명한 순수함은 은하수를 떠올리게 했다.
잠기운이 가득한 눈을 연신 비비던 여자아이는 통통한 작은 손으로 연소연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어머니, 무서워하지 마세요. 보아(寶兒)가 어머니를 지켜드릴 걱입니다!"
여자아이의 나른하면서도 달콤한 목소리에 연소연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 내리는 것만 같았다. 찌푸려졌던 미간이 순식간에 펴진 그녀의 입가에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다행인 것은 그동안 보아가 그녀의 곁을 지켜줬다는 것이다.
보아는 걸음을 뗀 이후부터 그녀의 곁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최선을 다해 그녀를 보살피며 그녀의 눈이 되어줬다.
강호를 떠돌며 안전을 위해 그녀는 자신과 보아를 남자의 차림새로 꾸몄다. 한 번도 불평한 적 없는 보아 덕분에, 그녀의 마음에도 따스한 물결이 일렁거렸다.
그녀의 자안을 물려받은 보아는, 그 덕에 동술 또한 익힐 수 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수위(修為)로 이미 영시 9단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녀는 보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착한 딸, 아니. 착한 아들. 이틀 후에 풍운성(鳳寧城)으로 갈 거야. 밖에선 나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
"네, 아버지. 걱정 마세요. 보아가 틀리게 부르는 일은 없을 거예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보아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보아도 진짜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보아야, 방금 뭐라고 했어?" 이제 막 침상에 누운 연소연은 깊게 잠들지 않았다.
보아는 연소연이 그녀가 중얼거린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보아는 두 살 때부터 아버지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마다 어머니의 기분이 언짢아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머니가 방금 그녀가 한 말을 듣지 못해서 다행이다.
보아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보아 잠이 안 와서 뒷간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연소연에게 더 캐물을 기회조차 주지 않기 위해 보아는 이불을 제치고 배를 움켜잡은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린아이의 어설픈 행동에 연소연은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보아는 참으로 일찍 철이 들었구나…'
그러나 그녀는 이번 생에 보아에게 진짜 아버지를 줄 수 없다. 그녀는 무책임한 남자가 증오할 뿐만 아니라, 그가 하루라도 빨리 죽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만약 죽지 않았다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게 해주리라!
보아에게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으로 결핍을 채워줄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와 보아에게 속해야 하는 모든 것들을 조금씩 되찾을 것이다. '만약 보아의 쌍둥이 오라버니가 아직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다 다시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낀 연소연은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내일 아침 일찍 잠에서 깬 후, 하삼계로 가야 하니 말이다.
그녀가 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리더니 허공에 한 송이의 금련(金蓮)이 피어나는 것이다. 활짝 핀 금련 위로 큰 키에 흰 옷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나타났다.
정교한 이목구비에 날카롭고도 무심한 눈빛이 유난히 인상적인 그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흰 옷자락이 허공을 우아하게 휘돌았다. 티 하나 없는 도자기 같은 피부와 몸에서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는 고귀한 기세는, 마치 신이 인간 세상에 내려온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침상을 돌아본 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지더니, 두 눈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고작 다섯 해 동안 중삼계의 행궁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뿐인데, 도둑이 그의 처소를 차지하고 있다니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군.
곧바로 침상 앞으로 빠르게 이동한 그는 손바닥에 영검을 응축하더니, 당장이라도 침상을 향해 그대로 내리칠 기세였다.
그러나... 허락도 없이 그의 침상을 차지한 자가 달콤하게 잠들어 있는 것이다.
창문을 통해 비춰 들어오는 달빛이 그녀의 몸에 쏟아져 내리며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은은하게 빛을 냈다.
달빛을 불빛 삼아 얼굴을 빤히 쳐다보니 하얀 얼굴에 느슨하게 자리한 눈썹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것 같았다. 그녀의 은봉 가면 아래 어떤 눈빛이 숨어있을지 궁금해졌다.
게다가 깊게 잠든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꽤 마음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익숙한 기운마저 은근히 느껴졌다.
익숙하면서도 흥미롭군.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신족의 왕인 그가, 왜 인간에게서 이런 익숙한 느낌이 드는지. 생각할수록 우스울 뿐이었다.
살육 앞에서도 한 치 망설임 없던 맹유신(封九宸)이, 이 순간만은 문득 마음을 바꿨다. 침상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선 그는, 연소연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했다.
정수리에 아무렇게나 튼 머리만 보면 남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가녀린 몸매에 백옥보다 흰 피부는 여인의 몸에서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매력이 나타났다.
사내인지 여인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연소연의 눈매와, 잠든 채로도 쓰고 있는 가면을 바라보며 맹유신의 머릿속에 문득 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혹 최고 수준에 이르는 이용술(易容術)을 익힌 걸까?'
호기심이 생긴 맹유신은 곧바로 연소연의 가면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챕터 목록
총 13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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