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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환생
비단 장막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심가연이 번쩍 눈을 뜨자, 눈앞에 연꽃색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코끝에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는 병상에 누워 매일 맡았던 쓰디쓴 약 냄새와는 사뭇 달랐다.
심가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어깨뼈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산적의 칼에 맞아 숨져 버렸던 그녀의 시녀 서향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며, 다급한 눈빛으로 서향을 돌아보았다.
"지금이 무슨 해며, 어느 날이냐?"
심가연의 심각한 표정에 서향이 재빨리 자세를 고쳐 잡고 대답했다.
"마님, 지금은 대운 백이십삼 년, 삼월 초열흘날이옵니다."
심가연은 비로소 소승욱과 혼례를 올린 지 고작 한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해 냈다.
이때의 소승욱은 후작이 아니라 소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고, 지금의 후작은 그녀의 시아버지인 소진충이다.
시아버지가 다른 황자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얼마 전 신임 황제에게 숙청당하면서 가문이 급격하게 몰락했던 것이다.
심가연은 이불을 걷어내고 옷을 입으며 서향에게 명령했다. "장부에서 은자 오만 냥을 빼내오너라."
앞으로 몇 달 후, 경성에 큰 역병이 돌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약재와 식량의 가격이 폭등하여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전생에 그녀는 역병이 돌기 시작할 때부터 상업적 기회를 발견했다. 하지만 어렵게 모은 약재와 식량을 소씨 가문의 명의로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가문의 명성을 높였고, 이를 통해 소씨 가문이 새 황제에게 다시 눈도장을 찍을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어리석지 않은 그녀는, 이 기회를 이용해 오롯이 자신을 위한 계획을 세울 작정이었다.
서향이 지체 없이 답했다. "예, 마님.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서향이 떠나자 심가연은 천천히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아름답고 앳된 얼굴을 보며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소승욱, 전생에 네가 저지른 모든 일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하나도 빠짐없이 치르게 하고 말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향이 빈손으로 돌아왔고 그녀의 뒤에는 마르고 홀쭉한 몸에 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바로 후작 부의 재산을 총괄하여 관리하는 장부 선생 주성덕이었다.
"주 선생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소? 내가 선생을 부른 기억은 없는데 말이오."
주성덕이 거만한 태도로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작은 마님, 소인은 명을 받들어 마님께 후작부의 규율을 조금 가르쳐 드리러 왔습니다."
"은자 오만 냥은 실로 막대한 금액이기에, 새로 들어오신 마님께서는 함부로 취하실 수 없사옵니다. 반드시 노부인의 윤허를 받으신 후에야 가능하옵니다."
심가연은 의자에 앉아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주성덕을 차갑게 쏘아봤다.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구나! 내가 가져온 혼수를 내가 쓰겠다는데, 어찌 다른 이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것이냐!"
"자네가 똑똑히 계산해 보거라. 지금 후작 부 창고에 쌓여 있는 은자 중, 얼마가 내 것이고, 얼마가 후작부의 재산인지를 말이다!"
여자의 혼수야 아무리 많아 봤자 얼마나 되겠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주성덕은 귀찮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장부를 펼쳐 들었다. "계산해 보면 그만이지요."
'노부인께서도 함부로 나를 다루지 못하시는데, 새로 들어온 부인이 이렇게 버릇이 없을 줄이야.'
오늘 이 자리에서야말로 새로 들어온 이 둘째 부인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후작 부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줄 작정이었다.
심가연은 냉소를 지으며 서향을 돌아봤다.
"내 혼수 목록을 가져오너라. 이 후작 부에 있는 은자 중 얼마가 내 것이고, 얼마가 소씨 가문의 것인지를 똑똑히 알게 할 거다."
주성덕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혼수 목록을 받아 들고, 품에서 주판과 장부를 꺼내 차례차례 계산하기 시작했다.
후작 부는 얼마 전 가문이 몰락했으니, 은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계산할수록 그의 안색은 점점 하얗게 질려 갔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흐르기 시작했다.
심가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가 내려다봤다.
"후작 부는 이제 빈털터리나 다름없다. 너희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들이 다 내 은자에서 나가는 것이고, 자네가 받는 봉록 또한 내 돈에서 나가는 것이다!"
"계속 후작 부에 남고 싶거든, 내 말을 잘 따르는게 좋을 지 싶구나."
주성덕은 상황을 판단할 줄 아는 자였다. 전생에서도 그녀는 약간의 수완으로 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번 생에서도 그리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주성덕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예, 마님. 소인 잘 알았사옵니다!"
"금일부터 소인은 오직 마님의 명에만 따를 것이며, 결단코 두 마음을 품지 않겠나이다! "
주성덕은 빠르게 물러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은자 오만 냥을 심가연의 처소로 보냈다.
전생과 이번 생은 너무 오랜 시간을 두고 있는 탓에, 심가연은 자신의 혼수 목록을 전부 기억하지는 못해, 혼수 목록을 펼쳐 들고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승욱이 이레마다 자신의 혼수에서 은자 백 냥을 빼내 외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생에 그녀는 장부에서 이 지출 기록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소승욱은 그 은자가 후작부의 옛 부하들을 위로하는 데 사용된다고 말했었다.
그녀는 소승욱의 말을 믿고 은자를 더 많이 가져가 절대 옛 부하들을 실망시키지 말라고 당부까지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후작부가 몰락하기 전부터 이미 쇠퇴의 조짐이 보였는데 위로해야 할 옛 부하들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 은자의 행방은 참으로 묘연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 날이 바로 소승욱이 은자를 꺼내는 날이다. 심가연은 서향과 함께 소승욱의 뒤를 몰래 밟았다.
후작 부를 나선 소승욱은 곧장 성남에 있는 한 저택으로 향했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저택의 문을 열었다.
안에서 이내 교태 섞인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승욱 오라버니, 오셨습니까."
담벼락 뒤에 몸을 숨긴 심가연은 문틈으로 저택 안을 조심스럽게 엿보았다. 저택 안에는 분홍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우아하게 서 있었다. 요염한 눈매를 가진 그 여인, 바로 이연아였다.
이연아는 빠르게 앞으로 다가가 소승욱의 팔짱을 끼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오늘은 안 오실 줄 알았습니다."
소승욱은 그녀의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너를 보러 오겠다고 약조했으니,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건 네게 줄 은자다. 네가 좋아하는 물건이라도 사거라. "
은자를 건네받은 이연아의 미소가 더욱 달콤해졌다.
"역시 오라버니께서 저를 제일 아끼시는군요."
문 밖에 몸을 숨긴 심가연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한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행태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녀가 시집오기 전부터 정을 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소승욱, 이연아. 이 간악한 놈들이! 감히 나를 이토록 처참하게 기만했단 말이냐!'
챕터 목록
총 9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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