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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사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일 고씨 그룹에서 분기결산 회의가 열릴 거야. 네가 직접 서면으로 사과의 뜻을 전해. 고 대표를 직접 만날 필요는 없고, 안내 데스크에 전달하기만 하면 돼." 한동현은 봉투를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형식적인 거야, 그럼 이번 일은 없던 일로 할 수 있어."

배지윤은 봉투를 쳐다보기만 할 뿐, 손을 내밀지 않았다.

"네가 억울하다는 거 알아." 한동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설득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 원래 그래. 갑이 태양이 네모라고 하면, 네모난 태양을 그려야 하는 거야. 가서 이것만 전달해. 회사 체면을 살려준다고 생각하면 돼."

배지윤은 결국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택시를 타고 고씨 그룹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11시가 조금 넘었다.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는 젊은 여직원은 배지윤이 고민준을 만나러 왔다는 말에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예약하셨나요?"

"아니요. 이 봉투만 전달해 주시면 돼요."

그녀가 봉투를 안내 데스크에 올려놓자,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지윤 씨?"

배지윤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주지훈의 표정이 복잡 미묘했다. 그는 그녀를 알아본 것 같았지만, 그녀를 알아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주지훈은 고민준의 비서로, 4년 전 배지윤과 꽤 많은 만남을 가졌었다.

"전달할 물건이 있어서 왔어요." 배지윤은 봉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달했으니, 이만 가볼게요."

"잠깐만요." 주지훈은 다가와 봉투를 흘깃 쳐다봤다. 봉투가 밀봉되지 않은 것을 발견한 그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사과문이에요?"

배지윤은 부정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주지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고 대표님은 지금 회의 중이에요. 위에 올라가서 기다리셔도 돼요."

"아니요. 괜찮아요."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주지훈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강경해졌다. "박시언 씨의 성격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오늘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박시언 씨가 또 이 일로 트집을 잡을 거예요. 그러면 고 대표님도 난처해지겠죠."

배지윤은 그런 주지훈을 가만히 쳐다봤다.

주지훈은 시선을 피하더니 말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28층은 여전히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배지윤은 탕비실 옆 복도에 앉아 있었다. 의자도, 물도 없었다. 주지훈은 그녀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한 뒤,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10분, 20분, 그리고 30분을 기다렸다.

위가 조금씩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침도 먹지 않았고, 어제 저녁에도 죽 반 그릇만 먹었다. 이 습관은 4년 전부터 생겼다. 그때 그녀는 동시에 세 가지 일을 했고,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고민준과 사귄 후, 그는 그녀에게 제때 밥을 먹으라고 당부했고, 아주머니를 시켜 학교에 도시락을 보내기도 했다. 그 2년 동안, 그녀는 위병으로 고생한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와 헤어진 후, 위병은 다시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배지윤은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10분만 더 기다리자. 10분 후에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냥 가는 거야.'

10분이 지났다.

그녀는 눈을 뜨고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때, 복도 끝에 있는 회의실 문이 열렸다. 정장을 입은 엘리트들이 회의실에서 쏟아져 나왔고, 고민준은 제일 마지막에 회의실에서 나왔다. 그는 옆에 선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무언가를 감지한 듯,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사무실 절반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그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자리에서 멈칫했다.

그는 바로 시선을 거두고 옆에 선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사무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배지윤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봤다.

3미터, 2미터, 1미터.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복도에 놓인 화분처럼 느껴졌다.

배지윤은 손에 쥔 봉투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고 대표님."

고민준은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사과하러 왔어요."

"무슨 사과?"

"어제 일 때문에요. 고 대표님께 폐를 끼친 것 같아 사과하러 왔어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고민준이 드디어 뒤를 돌아봤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서 시작해 아래로 내려갔고, 그녀가 미처 먹지 못한 위장약에 멈췄다. 위장약은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서 반쯤 튀어나와 있었다.

위장약을 흘깃 쳐다본 그가 다시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의 위장병은 아직 낫지 않은 것 같았다. 안색을 보니, 위장병이 다시 재발한 것 같았다.

"사과하러 온 사람이 태도가 이래요?"

배지윤은 고민준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고 대표님께서 원하시는 태도가 있다면, 제가 배울 수 있어요."

고민준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사과문."

배지윤은 손에 쥔 봉투를 그에게 건넸다.

봉투를 건네 받은 그는 봉투를 뜯지 않고 손에 쥐었다.

"또 할 말 있어요?"

"아니요."

배지윤은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몇 발자국 걸었을 때,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지윤."

그녀는 자리에 멈춰 섰다.

"사과문은 잘 받았어. 앞으로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배지윤은 자리에 멈칫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힐 때까지, 그녀는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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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목록

총 250장

  1. 1장제1화 재회
  2. 2장제2화 그날의 일
  3. 3장제3화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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