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671/coverbig.jpg)
/1/118378/coverbig.jpg)
제2화 빈집에 남은 남자
차태오는 그날 밤, 결국 이혼 서류에 서명하지 못했다.
펜은 손에 쥐고 있었다. 검은 만년필의 뚜껑도 열려 있었다. 서류 맨 아래, 한서윤의 이름 옆 빈칸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차태오.
석 자만 쓰면 끝나는 일이었다.
3년 전에도 그랬다. 결혼 서류에 이름을 적는 데 걸린 시간은 5초도 되지 않았다. 그때의 그는 결혼이란 사업상 필요한 결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한서윤은 그 결정의 조용한 상대였다.
말수가 적고, 선을 넘지 않고, 요구하지 않는 여자. 공식 석상에서 웃어야 할 때 웃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며, 그의 곁에 있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
태오는 그런 서윤이 편했다.
편하다는 말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그는 그때 몰랐다.
펜촉이 종이 위에 닿았다.
차.
거기서 멈췄다.
태오는 한참 동안 미완성된 성씨 하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잉크가 종이 섬유 사이로 아주 조금 번졌다. 마치 지워지지 않을 흠처럼.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서명하지 않겠다는 결정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넓은 집 안에 길게 울렸다.
그는 습관처럼 주방 쪽으로 걸었다.
컵장 두 번째 칸. 서윤이 늘 찻잔을 두던 자리였다. 손잡이가 얇은 흰 도자기 잔. 그녀는 그 잔을 태오의 것이라고 했다.
태오는 그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이 잔은 당신이 쓰세요.”
“굳이 정할 필요 있습니까.”
“필요 없으면, 제가 정할게요.”
그때 서윤은 살짝 웃었다. 눈꼬리가 아주 부드럽게 접히는 웃음이었다.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날도 차를 반쯤 남겼다.
그 잔은 없었다.
컵장 안은 정리되어 있었다. 지나칠 만큼 말끔하게.
태오는 문을 닫지 못했다.
그는 주방 상판을 짚었다. 손끝에 차가운 대리석 감촉이 닿았다. 새벽마다 불이 켜져 있던 주방. 아무 말 없이 데워져 있던 국. 그가 손대지 않아도 다음 날이면 사라져 있던 찻잔.
모든 것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있었다.
그는 그걸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강유라였다.
태오는 받지 않았다.
벨소리는 집요했다. 한 번 끊기고, 곧 다시 울렸다. 화면 위의 이름이 검게 빛났다.
그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빈집은 소리를 냈다. 냉장고의 낮은 진동, 빗물이 창문을 치는 소리, 어딘가에서 작게 울리는 배관 소리.
그리고 없는 사람의 기척.
태오는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낯선 공간이 나타났다.
서윤이 쓰던 쪽은 텅 비어 있었다. 옷걸이 몇 개만 가지런히 남아 있었다. 향수 냄새도 거의 사라졌다. 다만 한쪽 선반에 놓인 작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태오는 상자를 꺼냈다.
안에는 낡은 커프스 단추 하나가 들어 있었다.
검은 자개가 박힌 단추. 그는 오래전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결혼식 다음 날, 출근 준비를 하다 없어진 줄 알았던 물건이었다.
왜 이게 여기에 있지.
상자 밑에는 작은 메모지가 깔려 있었다.
태오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왼쪽 단추가 조금 헐거워요. 다음에 수선 맡길 때 같이 보내야겠다.
서윤의 글씨였다.
단정하고 작았다.
그는 메모지를 한참 바라보았다. 기억이 느리게 되살아났다.
결혼식 다음 날 아침.
태오는 새벽 회의가 있었다. 웨딩 촬영도, 피로연도, 형식적인 인사도 끝난 뒤였다. 모두가 피곤해하던 아침,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셔츠를 입었다.
그때 서윤이 조용히 다가왔다.
“잠깐만요.”
그녀는 그의 소매 끝을 잡고 커프스 단추를 만졌다. 손끝이 아주 차가웠다. 태오는 그 온도만 기억했다.
“단추가 빠질 것 같아요.”
“괜찮습니다.”
“빠지면 잃어버려요.”
“그 정도 물건은 다시 사면 됩니다.”
그 말에 서윤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단추를 풀어 가져갔다.
태오는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버리지 않았다.
3년 동안, 이런 것까지 가지고 있었다.
태오는 메모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났다. 그는 곧 손을 풀었다.
구기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현관 벨이 울린 것은 새벽 세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태오는 미간을 좁혔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없었다.
인터폰 화면에 서 있는 사람은 강유라였다. 검은 코트 차림에 젖은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고 있었다. 얼굴에는 피곤함보다 불쾌함이 먼저 떠 있었다.
태오는 문을 열지 않았다.
통화 버튼만 눌렀다.
“무슨 일입니까.”
강유라의 눈썹이 올라갔다.
“문도 안 열어 줄 거예요?”
“용건부터 말하십시오.”
“태오 씨답지 않네요. 방금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데.”
“늦었습니다.”
“그래서 왔어요. 더 늦기 전에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유라는 화면 속에서 작게 웃었다.
“한서윤 씨 나갔다면서요.”
태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누가 말했습니까.”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한 건 이제 계약이 끝났다는 거죠.”
그녀는 우산 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이제 우리 쪽도 움직여야 해요. 이사회 전에 약혼 기사 내보내는 게 낫겠어요. 어차피 한서윤 씨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태오의 손이 인터폰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말조심해.”
짧고 낮은 말이었다.
강유라의 표정이 굳었다.
“뭐라고요?”
“한서윤 이름, 그렇게 부르지 마.”
화면 속 정적이 길어졌다.
강유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태오 자신도, 방금 제 입에서 나온 말을 한 박자 늦게 들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서윤의 편을 들어 준 적이 없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는.
강유라가 천천히 웃었다.
“이상하네요.”
“돌아가십시오.”
“진짜 이혼할 거잖아요.”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유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설마 이제 와서 아깝기라도 해요? 차태오 씨가?”
그 말은 정확했다.
아깝다.
잃기 싫다.
내 것이었으니 다시 돌려놓고 싶다.
그런 감정이라면 설명이 쉬웠다. 태오가 잘 아는 방식이었다. 소유, 통제, 회수, 정리. 그는 언제나 그런 단어들로 세상을 다뤘다.
하지만 서윤은 물건이 아니었다.
계약서의 조항도, 가문의 장식도, 그의 곁에 놓아둘 수 있는 조용한 그림자도 아니었다.
그리고 방금 떠난 사람은, 다시 부른다고 돌아올 사람이 아니었다.
태오는 마른 입술을 열었다.
“아니.”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늦은 것 같습니다.”
강유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요?”
태오는 인터폰 화면 속 자신의 흐릿한 얼굴을 보았다. 피로한 눈, 헝클어진 머리, 목까지 풀린 셔츠. 완벽과는 거리가 먼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내가 너무 늦은 것 같다고.”
그는 통화를 끊었다.
벨이 다시 울리지 않았다.
태오는 현관 앞에 한참 서 있었다. 문 너머에 사람이 떠나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졌다. 그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집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서윤은 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작은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스튜디오 근처에 급하게 구한 집이었다. 방 하나, 거실 하나, 작은 주방. 태오의 집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좁았지만,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이상하게 숨이 놓였다.
비에 젖은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상자들은 아직 풀지 못했다. 작은 공간에 쌓인 짐들이 서윤의 지난 3년을 말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옷 몇 벌, 책, 작업 도구, 낡은 사진첩, 찻잔 두 개.
그녀는 그중 하나를 꺼냈다.
흰 도자기 잔.
태오가 한 번도 제대로 비우지 않았던 그 잔과 같은 세트였다. 원래는 두 개였다. 하나는 두고 왔고, 하나는 가져왔다.
서윤은 그 잔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버릴까 생각했다.
그러다 손을 멈췄다.
버리는 것도 아직은 감정이 필요했다. 미워하는 일에도 힘이 든다는 걸, 서윤은 오늘 처음 알았다.
그녀는 대신 주전자를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 메시지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아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서윤은 휴대폰을 엎어 두고 창가로 갔다. 오피스텔 창밖으로 새벽 도로가 보였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가로등이 길게 번져 있었다.
그녀는 왼손 약지를 내려다보았다.
반지가 있던 자리는 하얗게 남아 있었다. 얇은 자국. 아주 오래 묶여 있다가 풀린 실처럼.
서윤은 그 자국을 엄지로 문질렀다.
사라지지 않았다.
“괜찮아.”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괜찮다는 말은 아직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이 되게 만들 수는 있었다.
주전자가 울었다.
서윤은 차를 우렸다. 이번에는 태오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자 손끝에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녀는 식탁이라 부르기에도 작은 원형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리고 계약 종료 후 해야 할 일들을 수첩에 적기 시작했다.
스튜디오 확장 계약 최종 확인.
변호사에게 이혼 서류 발송.
주소 이전.
새 명함 디자인.
태오 씨 물건 정리.
마지막 줄에서 펜이 멈췄다.
태오 씨.
서윤은 그 글자를 가만히 보다가, 두 줄로 지웠다.
그리고 다시 적었다.
차태오 관련 물건 정리.
이름 하나 바꾸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게 조금 우스워서, 서윤은 작게 웃었다.
웃음 끝이 젖어 있었다.
초인종이 울린 건 그 순간이었다.
서윤의 손이 멈췄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초인종은 다시 울리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이 진동했다.
낯선 번호였다.
서윤은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한서윤 씨 맞으십니까?”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네, 그런데요.”
“태경그룹 법무팀입니다.”
찻잔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시죠?”
상대는 짧게 숨을 골랐다.
“차태오 본부장님 지시로 연락드렸습니다.”
서윤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벌써 시작이구나.
그가 서류 처리를 서두르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변호사를 통해 조건을 조정하자는 연락일 수도 있었다. 역시 그다운 방식이었다. 감정이 아니라 절차. 대화가 아니라 통보.
서윤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말씀하세요.”
상대가 말했다.
“이혼 서류 접수는 보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서윤의 시선이 천천히 창밖으로 향했다.
비가 아직 그치지 않았다.
“무슨 뜻이죠?”
“본부장님께서 직접 만나 이야기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서윤은 입술을 다물었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피곤하고 창백했지만, 울고 있지는 않았다.
그건 다행이었다.
“전 할 말 다 했습니다.”
“본부장님께서는...”
서윤은 조용히 말을 끊었다.
“그분께 전해주세요.”
차가운 찻잔의 온기가 손바닥 안에서 조금씩 식어 갔다.
“이번엔 제가 보류하지 않는다고요.”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수화기 너머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낮고 익숙한 목소리.
“한서윤.”
서윤의 호흡이 멎었다.
법무팀 직원의 전화가 아니었다.
그는 거기에 있었다.
아니, 듣고 있었다.
태오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갈라졌다.
“한 번만 만나.”
서윤은 눈을 감았다.
예전의 그녀라면 그 한마디에 무너졌을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부탁처럼 말했으니까. 명령이 아니라, 통보가 아니라, 어쩌면 처음으로.
그러나 서윤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도자기가 테이블에 닿으며 낮은 소리를 냈다.
“싫어요.”
침묵.
그 짧은 한마디가, 3년 동안의 어떤 말보다 길게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태오가 아주 낮게 숨을 들이켰다.
“서윤아.”
처음이었다.
그가 그녀를 그렇게 부른 건.
서윤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이름으로 부르기엔 너무 늦었어요.”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화면은 다시 어두워졌다. 작은 방 안에는 비 내리는 소리와, 아직 식지 않은 차 향만 남았다.
서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대신 수첩을 다시 펼쳤다.
방금 지운 이름 아래에, 새로운 문장을 적었다.
돌아가지 않는다.
펜 끝이 종이를 꾹 눌렀다.
그 순간, 휴대폰 화면이 다시 밝아졌다.
이번에는 메시지였다.
차태오.
내일 오전 10시. 네 스튜디오로 가겠다.
서윤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오지 마세요.
몇 초 뒤,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가겠습니다.
서윤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창밖에서 새벽의 빗줄기가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서윤은 알았다.
진짜 폭풍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챕터 목록
총 33장
/0/90407/coverbig.jpg)
/1/103589/coverbig.jpg)
/0/98786/coverbig.jpg)
/0/98997/coverbig.jpg)
/1/110915/coverbig.jpg)
/1/129329/coverbig.jpg)
/1/129395/coverbig.jpg)
/1/129328/coverbig.jpg)
/1/129330/coverbig.jpg)
/1/131294/coverbig.jpg)
/1/131303/coverbig.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