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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왜 갈수록 악독해지는 거야

김유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방금 샤워를 마친 박주헌의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몸에 짙은 회색의 홈웨어만 걸치고 있었지만 잘생긴 얼굴과 우월한 기럭지는 여전했다. 모든 여자들의 이상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외모였다. 얼굴에 자리한 그 엄숙한 표정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김유나는 입술을 꼭 깨문 채 그의 시선을 피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연서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일부러 화난 척 박주헌을 흘겨보더니 다가가 그의 팔짱을 꼈다.

"왜 유나한테 화를 내고 그래? 잠에서 깨면 짜증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너도 평소에 짜증 많이 내잖아."

민연서는 그를 나무랐지만 왠지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김유나의 안색이 창백해 졌고 그녀는 여기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주헌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러나 아까처럼 싸늘한 분위기는 풍기지 않았다. 그는 민연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김유나를 향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서재로 따라와."

"너 유나 어른인 건 맞아. 그렇다고 해서 유나를 항상 그렇게 엄격하게 대해선 안돼, 좋게 타이를 수도 있잖아."

김유나는 침묵을 지켰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민연서는 벌써부터 안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김유나는 속으로 차갑게 실소를 흘렸다. 딴 생각을 하던 그녀는 앞장 서 걷던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그의 등에 코를 박고 말았다.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 거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든 김유나는 박주헌의 차갑게 식은 눈빛과 마주쳤다.

그녀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요?"

어쩌면 마지막 남은 미련일지도 몰랐다. 혹은 그저 그의 반응이 궁금했을 수도 있다.

박주헌은 미간을 더욱 찌푸리고 그녀를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말했다. "김유나, 쓸데 없는 생각은 거두라고 했지. 너 곧 졸업이잖아.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을 찾아 줄게. 단! 그 사람은 절대 내가 아니야. 난 네 삼촌이고 연서는 앞으로 네 작은 어머니가 될 사람이야. 날 존경하는 것처럼 연서도 존경해야 해. 알겠어?"

처음 듣는 말이었다.

박주헌은 그녀를 사랑하기는커녕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보내려고 했다.

강서준이 한 말이 맞았다.

'하… 난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이미 마음을 굳게 먹지 않았던가?'

김유나는 숨을 깊게 들이 마셨다. 한 사람을 포기하는 것이 생각했던 것처럼 어렵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작은 삼촌."

박주헌은 그런 그녀의 반응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적잖이 놀란 모습이었다.

김유나는 사고를 치고 용서를 구할 때만 그를 작은 삼촌이라고 불렀다. 평소라면 분명 그에 말에 토를 달며 맞받아쳤을 것이다.

김유나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 "연서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봐봐. 아침까지 직접 차려주잖아. 연서한테 적대감 갖지 마. 알겠어?"

민연서가 아침을 차려주지 않았어도, 박주헌은 직접 아침을 차려줬을 것이다.

그리고 김유나는 애초에 아침을 먹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작은 어머니와 잘 지낼게요."

막주헌은 그런 그녀의 반응이 왠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입을 입을 열었다. "어제는 왜 오지 않았어?"

어제는 그의 28번째 생일이었다.

사실. 김유나가 가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다만 아무도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

김유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학교에 강좌가 있었어요. 강좌가 끝나기도 했고 피곤하기도 해서 바로 집에 왔어요. 작은 삼촌, 생일 축하해요."

모든 걸 정리하고 떠나고 싶은 그녀였다. 그러니 더 이상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 그는 짧게 대답하고 나서 김유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작은 삼촌한테 말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알겠어? 이제 아침 먹으러 내려가자."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람이 사랑하는 여자까지... 셋이서 아침을 먹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던 김유나였다.

아이러니한 상황에 그녀는 핑계를 대고 먼저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박주헌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이제는 이런 상황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지켜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침을 먹은 후, 박주헌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김유나도 방으로 돌아가 짐을 챙길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학교에 가서 지도 교수와 인턴십에 대해 상의해야 했다.

"유나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주방 문 앞에 서서 고무 장갑을 손에 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민연서가 보였다. 태연하고 우아한 모습은 마치 박씨 가문의 안주인 같았다.

김유나는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았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고... 그냥 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래."

민연서가 미소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눈에까지 번지지 않았다. "월반 까지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한다며? 이제 곧 졸업인데, 어디서 인턴생활을 할지는 생각해 봤어?"

관심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그녀를 떠보고 있었다.

김유나는 싱긋 미소 지었다. "그건 작은 어머니가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박주헌의 뜻을 따른 다면 그녀는 박씨 그룹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당시 그 소식을 들은 김유나는 날아 갈 듯 기뻤다. 그와 어깨 나란히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딱히 그럴 마음이 없었다.

민연서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난 그저 네가 신경 쓰여서 물어본 거야. 네 작은 삼촌은 남자잖아. 너와 이런 이야기를 세세한 얘기를 나누는게 불편할 것 같아서."

'뭐가 불편하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크든 작든 모든 일을 박주헌에게 털어 놓았던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눈 앞의 여자는 그의 여자친구다. 하여 그녀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던 김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예상치 못했던 김유나의 반응에 민연서의 눈빛에 의외의 빛이 감돌았다. "이제 너도 다 컸잖아, 삼촌과 함께 사는 게 불편하지 않아? 아니면 나랑 같이 사는 건 어때? 나 혼자 사는게 외로웠거든."

사랑 싸움이 난무하는 드라마를 적지 않게 봐 왔던 김유나는 여자들의 여우짓이 낯설지 않았다.

드라마를 볼 때만 하더라도 TV속 내용이 너무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일 줄이야.

함께 살고 싶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그저 그녀를 박주헌의 곁에서 떼어 놓고 싶었을 뿐이다.

김유나는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가 민연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작은 어머니, 저를 이렇게까지 걱정해 주시다니요. 설마 제가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그 순간, 민연서는 김유나에게서 박주헌에게서만 느낄 수 있던 압박감을 느껴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때, 민연서의 시선이 잠깐 김유나의 뒤에 머물렀다. 이내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나야, 내가 너한테서 네 삼촌을 뺏어 갈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헌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여전히 너야... 난 ... 앗!"

말은 하던 그녀는 문턱에 걸려 중심을 잃었고 비틀거리며 뒤로 넘어졌다.

김유나가 그녀를 부축하려 할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 한쪽으로 끌어냈고 그녀는 테이블에 부딪히고 말았다.

박주헌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목소리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김유나! 넌 애가 왜 갈수록 악독해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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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목록

총 137장

  1. 1장제1화 걔를 좋아하게 될 일은 절대 없어.
  2. 2장제2화 왜 갈수록 악독해지는 거야
  3. 3장제3화 강서준, 나 다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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