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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펠로우십 자리는 아직 비어 있습니다, 서은하 박사님. 와주신다면 저희야 영광이죠.” 수화기 너머 책임자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하지만 조건은 이해하고 계시죠? 6개월간 완전한 고립입니다. 외부와의 접촉은 일절 금지됩니다.”

“이해합니다.”

내가 말했다.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 사라질 수 있는 곳. 끝없는 어둠의 터널 속 유일한 빛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쳐놓겠습니다. 오시는 일정만 알려주세요.”

그가 약속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무감각한 감정 사이로 희미하게 스며드는 희망을 느끼며 말했다.

“취리히에서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우리의 집. 그 생각만으로도 입안이 썼다.

현관문을 열자 거실 가득한 우리 삶의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기괴한 희극이 되어버린 삶의 상징들. 카운터 위의 커플 머그잔. 벽난로 위 선반에 놓인 결혼식 사진. 나를 꼭 감싸 안은 그의 팔. 모든 물건이 거짓의 증거였다.

역겨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부엌에서 쓰레기봉투를 집어 들고 폭풍처럼 집안을 휩쓸기 시작했다. 머그잔이 먼저 봉투 안으로 던져져 산산조각 났다. 사진 액자가 그 뒤를 따랐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은 모조리 액자에서 꺼내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내 옷장에 걸린 그의 옷들, 그가 ‘출장’에서 돌아올 때마다 사다 준 시시껄렁한 기념품들까지.

모든 것을 봉투에 쓸어 담았다. 나는 불타는 분노로 그 봉투들을 길가에 내다 버렸다.

그러고 나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내 의학 서적, 연구 논문, 내 옷들. 온전히 내 것인 모든 것. 나는 이삿짐센터에 연락해 가장 친한 친구 지아의 집으로 짐을 보내달라고 예약했다.

그날 밤, 강태준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저녁, 그는 피곤하지만 미소를 띤 얼굴로 집에 들어왔다. 서류 가방을 내려놓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나를 끌어안았다.

“세상에,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그가 내 머리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의 셔츠에서 다른 여자의 낯선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그가 그 아이를 안고, 최유라에게 입 맞추던 모습이 떠올랐다. 구역질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의 미소가 사라지고 걱정스러운 표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왜 그래, 은하야? 몸이 차갑네.”

“괜찮아.”

내 목소리는 감정 없이 밋밋했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서류 가방에서 선물 포장된 상자들을 꺼냈다.

“출장 다녀오면서 당신 선물 사 왔어.”

그는 심지어 출장의 증거까지 위조했다. 최유라가 좋아할 법한 디자이너의 실크 스카프. 향수 한 병. 나는 그 향을 즉시 알아차렸다. 최유라가 병원에서 뿌렸던 바로 그 향수였다. 대학 시절, 그가 내 생일 선물이라며 주었던 것과 같은 향수. 그 향수의 특정 성분에 내가 심한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결국 응급실 신세를 졌었다. 그는 죄책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나에 대한 모든 것,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모두를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는 잊었다.

소리치고 싶었다. 그 상자들을 그의 얼굴에 던져버리고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딱딱하게 말했다.

“나 아기 갖고 싶어, 태준 씨. 지금 당장.”

그의 표정이 변했다. 스쳐 지나가는 당혹감, 그리고 이내 지친 인내심으로 가득 찬 가면을 썼다.

“우리 얘기했잖아. 회사가 막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어. 내가 지금 압박이 심해.”

똑같은 변명. 언제나 똑같았다.

그의 휴대폰이 울리며 그를 구했다. 나는 서 있는 자리에서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수화기 너머 최유라의 목소리, 그리고 아빠를 부르며 우는 준서의 목소리.

그 순간 깨달았다. 그는 나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 그의 사랑, 그의 미래, 그의 가족은 이미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제는 배신의 낙인처럼 느껴지는 그 행동.

“일 때문에.”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급한 일이라 가봐야 해. 늦게 들어올 거야.”

나는 창밖으로 그가 차에 올라타 급히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싸울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휴대폰에 알림이 떴다. 모르는 이름의 친구 요청이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수락했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녀의 프로필은 내 남편의 비밀스러운 삶을 위한 신전이었다. 공원에서, 우리가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서, 회전목마 위에서 준서와 함께 있는 태준의 사진들. 그리고 그 사진들 아래에는 내가 아는 사람들, 그의 친구들, 우리의 친구들이 남긴 댓글과 ‘좋아요’가 줄지어 있었다.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었다. 나만 빼고.

격렬한 경련이 배를 움켜쥐었다. 감정적인 고통이 물리적인 타격으로 나타났다. 나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붙잡고 구역질을 해댔다.

몸 상태가 이상했다. 이건 단순히 상심 때문이 아니었다. 의사로서 나는 그 징후들을 알았다. 기적이자 저주인 하나의 가능성이 마음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날 밤, 그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내가 일하는 병원으로 갔다. 믿을 만한 동료에게 검사를 부탁했다.

그녀는 검사 결과를 들고 돌아왔다. 미소를 지으며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축하해, 은하야.”

그녀의 목소리는 내가 느낄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임신 6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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