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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더러워
소한주는 캐리어에서 옷 한 벌을 꺼내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에요. 이제 그만 나가주세요."
그녀는 남자가 한시라도 빨리 방에서 나가기만을 바랐다.
조금 전,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등을 쓸어 내리는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졌는지 치가 떨렸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 굳은 살이 많이 박힌 점과, 칼을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고 반사신경이 경이로운 것을 보아 보통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소한주는 남자의 정체에 대해 더 고민하지 않기로 하고 무심하게 캐리어를 닫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경적 소리가 방안의 어색한 침묵을 깼다. 남자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급박한 상황에 셔츠 단추를 모두 풀었지만,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창가에 다가선 그가 셔츠 단추를 잠그며 소한주에게 무언가를 가볍게 던졌다. "아까는 너무 급박한 상황이라 결례를 범했어요. 이건 보상이라고 생각해요."
말을 마친 그는 날렵하게 창틀을 잡고 걸터앉더니 그녀를 향해 싱긋 웃고는 몸을 뒤로 넘기며 창밖으로 사라졌다.
화들짝 놀란 소한주가 창가에 다가가 밑을 내려다보자 희미한 가로등 아래 남자는 맨손으로 벽을 타며 빠른 속도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내 땅바닥에 발을 디딘 남자는 마치 한 마리의 민첩한 치타처럼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허리를 굽혀 남자가 던진 물건을 줍자 한 장의 검은색 카드였다.
거의 잠들 뻔했던 그녀의 방에 갑자기 쳐들어왔으니 보상은 응당 받아야 하는 것이다. 소한주는 카드를 주머니에 넣고 창문과 커튼을 굳게 닫았다.
다음 날 아침, 그녀를 보자마자 집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 어젯밤 잘 주무셨습니까? 이곳 직원이 말하길, 어젯밤 모텔에 도둑이 들어 한참 시끄러웠다고 합니다."
소한주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네, 괜찮았어요."
집사는 룸미러로 뒷자리에 앉은 그녀를 흘깃 쳐다봤다. 뒷자리에 기대앉아 창 밖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은 우아하고 기품이 흘러 넘쳤다.
집사는 그녀가 전혀 시골에서 자란 소녀 같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분하면서도 고상한 품위와 세련된 얼굴은 시골에서 자란 여인들과 차원이 달라도 완전히 달랐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호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꼬박 이틀이 걸리고 나서야 소한주는 경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성은 특별시로 밤낮을 불문하고 활기와 열정이 넘치는 도시다.
오후 8시쯤, 소한주를 태운 차가 3층짜리 고급 저택 앞에 미끄러지듯이 멈춰 섰다.
먼저 차에서 내린 소한주는 웅장하게 자리한 3층 저택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굉장하고 화려한 저택은 막대한 부를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택 곳곳을 세심하게 관찰한 그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잔뜩 피어 올랐다.
저택의 주인은 바로 그녀의 아버지인 소승제다. 시골 가난한 집 자식인 소승제는 그녀의 어머니와 결혼하고 명예와 부를 모두 얻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승제는 모든 재산을 빼앗은 뒤, 그녀의 어머니를 매몰차게 차버리고 정부를 선택했다.
그의 내연녀인 당윤미는 사실상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그녀의 어머니 자리를 꿰차지 한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의 그녀는 결코 자신의 힘으로 누릴 수 없을 만큼의 사치와 존중을 받으며 당당하게 소씨 가문 사모님의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
심지어 몇 년 전엔,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자 슬픔에 빠진 소한주의 어머니를 찾아가 소승제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기까지 했다. 그 결과 소한주의 어머니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당윤미가 아름다움과 지혜로움으로 소승제의 두 번째 아내 자리를 차지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그녀의 친 어머니라고 뻔뻔스럽게 주장하고 다녔다.
그러나 소한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당윤미의 화려한 가면 뒤에 얼마나 추악하고 가증스러운 얼굴이 숨어있는지.
과거를 떠올린 소한주의 두 눈이 결의에 찬 듯 위험하게 뻔뜩였다.
두 사람이 그녀의 어머니에게 진 빚을 갚지 못했으니, 이제 그녀가 그 빚을 대신 받아야 할 차례다.
바로 그때, 저택 문이 활짝 열리며 두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맞춤 정장에 금테 안경으로 날카로운 눈매를 강조한 소승제는 큰 키가 인상적이었다.
그의 곁에는 매혹적인 몸매를 그대로 드러낸 당윤미가 몸에 꼭 맞는 원피스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한주야, 드디어 돌아왔구나." 소승제가 먼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며 따뜻하게 맞이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시선을 아래로 떨군 소한주는 두 눈에 가득 피어 오른 증오를 최대한 감추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당당히 고개를 들고 주저 없이 다가갔다.
소승제는 당윤미의 허리를 다정하게 감싸며 그녀를 향해 소개했다. "한주야, 인사부터 해야지. 이 사람이 바로 네 어머니다."
그리고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가리키며 계속해서 말했다. "태리는 네 동생이야."
거실 소파에 앉아 TV에 시선을 고정한 소태리는 소한주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경멸 어린 눈빛으로 소한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그녀가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잔뜩 비아냥거렸다. "난 시골 촌뜨기를 언니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요."
그때 당윤미가 빠르게 다가와 소한주의 팔을 잡고 설명을 보탰다. "한주야, 태리가 아직 어려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구나. 태리가 하는 말에 신경 쓸 필요 없어.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엄마가 맛있는 아침을 만들었단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자."
소한주는 잡힌 팔을 힘껏 뿌리치고 홀로 주방으로 향했다.
안색이 순식간에 굳더니 서러운 듯 눈매를 아래로 떨군 당윤미가 소승제를 돌아보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여보, 한주가 저를 싫어하는 건 아니죠?"
소승제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당윤미를 위로했다. "한주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예의범절에 대해 모를 수 있어. 당신한테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야."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당윤미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오늘부터 한주가 우리 가문에 적응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가르칠게요. 경성에서 제일 아름답고 우아한 아가씨로 만들 거예요."
소승제는 어리지만 현명한 아내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주방으로 들어온 당윤미는 소한주의 손을 끌고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한주야, 엄마가 직접 만든 육회부터 먹어봐." 당윤미는 말과 함께 육회 한 점을 떠서 소한주의 접시에 놓았다. "태리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야."
그러자 소한주는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접시에 놓은 육회를 휴지에 싸서 역겹다는 듯이 던졌다. "역겨워."
챕터 목록
총 17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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