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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약속

전화기 너머, 그녀의 통화 상대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였다. 그의 얼굴은 조각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준수했으며, 온몸에서 우아한 기품이 감돌았다.

남자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 살짝 당황한 빛이 스치듯 지나갔다.

강은서가 한참을 기다렸지만 답이 없자,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 내가 너무 경솔했어. 그냥 무시해…"

"유효 해."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에 강은서는 깜짝 놀랐다.

솔직히 말을 꺼낸 순간부터, 그녀는 약간 후회하기 시작했다.

지상철과 약혼을 파기하는 건 그렇다 쳐도, 김서준과 결혼하는 건 위험한 도박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어둠 속에서 강은서의 기억이 1년 전으로 흘러갔다.

그날도 깊은 밤이었다. 평소처럼 병원에서 나오던 그녀는 서쪽 골목에서 의식을 잃은 김서준을 발견했다.

그를 구할 당시 강은서는 그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보답을 하겠다는 말에 어떤 요구든 다 들어줄 수 있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김서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반응이 내심 흥미로웠던 그녀는 농담 식으로 자신과 결혼해 줄 수도 있냐고 물었다.

강은서는 그저 장난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김서준이 진짜로 고개를 끄덕일 줄은 몰랐다.

당시 강은서는 이미 지상철과 약혼한 상태였고 그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정해준 혼약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농담이었다고 얼른 수습에 나섰다.

그녀가 이미 약혼을 했다는 말에 김서준은 더 이상 결혼 얘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혹시라도 지상철과의 결혼을 원하지 않게 되면 언제든지 자신과 결혼해도 되며 이 제안은 2년간 유효하다고 말했다.

아직 그 유효 기간이 지나지 않았다.

강은서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 탓에 전화가 끊긴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머릿속엔 한 달 뒤에 결혼 할거니 미리 결혼 준비를 하라는 김서준의 말만 맴돌 뿐이다.

그녀의 결혼 상대는 당연히 지상철이 아니었다.

강은서는 어둠을 더듬어 침대에 누웠고, 온몸이 지쳐 있었지만 잠들 수가 없었다.

간신히 잠들려는 순간, 휴대폰에서 끊임없이 메시지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외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있었기 때문에, 강은서는 휴대폰을 꺼두거나 무음 모드로 설정하지 않았다.

메시지를 열자, 찢어진 옷 조각 사진이 나타났다.

한참을 들여다본 뒤에야, 비로소 그 조각이 지상철이 오늘 입고 있었던, 그녀가 직접 만든 맞춤 정장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진과 함께 강은영의 문자가 도착했다.

[언니, 정말 미안해. 이 양복이 언니가 상철 오빠한테 직접 만들어준 거란 걸 몰랐어. 그냥 더러워져 있길래 잘라 버렸어. 화내지 마.]

강은영의 말투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배어 있었다.

강은서가 답장하지 않자, 강은영은 또 한 통의 문자를 보냈다.

[상철 오빠가 그냥 옷 한 벌일 뿐이라며, 미안해 할 필요 없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혹시나 해서...]

강은서는 지금 답장하지 않으면 오늘 밤 잠들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짧게 답장했다.

[지상철 말대로 그냥 옷 한 벌일 뿐이야. 나 화 안 났어.]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그녀는 강은영의 번호를 차단해 버렸다.

강은서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화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지난 2년간 이런 일은 수없이 많았으니 말이다.

그녀가 매번 화를 냈다면, 진작에 미쳐버렸을 것이다.

다시 누운 강은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늘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엄마가 혹시, 후회를 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은영은 강은서의 이복동생으로, 강은서보다 몇 달 어렸다.

강은서의 어머니 배여정은 강은영의 존재를 알게 되자마자 그들 모녀를 해외로 내보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강씨 그룹을 위해 헌신하고 애써온 탓에 배여정의 건강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배여정의 병세가 위중해지던 그 해, 강승윤은 하예원과 강은영 모녀를 강씨 가문으로 데려왔다.

배여정은 강은서에게 새어머니가 생긴다면 삶이 힘들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강승윤은 원래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배여정은 강은서와 지상철의 혼사를 정했다.

그 이유는 배여정과 지상철의 어머니 서희연은 오랜 친구 사이였기 때문이다.

강은서와 지상철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으며, 여기에 서희연과의 인연까지 겹쳐 배여정은 강은서가 지씨 가문에 시집가면 분명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배여정은 사람이란 쉽게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다.

배여정은 세상을 떠나기 전, 지상철에게 강은서를 부탁했다.

그리고 지상철은 서희연과 강은서가 지켜보는 가운데, 단호하게 약속을 했다.

그의 그런 확고한 태도에, 강은서 역시 그 순간만큼은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새벽, 강은서는 갑작스러운 힘에 이끌려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분노로 일그러진 지상철의 얼굴이었다.

손목의 통증에 강은서는 지상철을 세게 뿌리치며 소리쳤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짓이야?"

"강은서,

너는 우리 엄마한테 고자질 하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야?"

그 말에 강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영상은 온라인에 이미 퍼진 상태라 희연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지상철은 서희연의 전화를 받자마자, 무조건 강은서가 고자질을 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에 강은서는 설명하려는 마음조차 없었다.

단지, 이 약혼을 파기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 졌을 뿐이다.

강은서의 침묵은 지상철에게는 인정하는 것으로 보였고, 지씨 가문으로 가는 길 내내 그는 비난의 말들을 끊임없이 늘어 놓았다.

하지만 지씨 가문의 저택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지상철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그의 순간적인 태세 전환을 지켜보던 강은서는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나도 눈이 멀었지...'

전에는 지상철이 이렇게나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인간인 줄 몰랐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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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목록

총 122장

  1. 1장제1화 문신
  2. 2장제2화 약속
  3. 3장제3화 맘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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