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건너뛰기

제2화 아버지

다음 날 오전. 경시에 도착한 지하린은 클라우드 호텔에 체크인했다.

풀 옵션이 갖춰진 스위트룸에서 지하린은 겉옷을 대충 벗어 소파 위에 툭 던져두곤 곧장 통창 앞으로 다가갔다.

눈앞에 펼쳐진 높은 빌딩들과 분주히 도로를 누비는 차량들까지, 이렇게 복잡한 도심의 풍경을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여섯 살이던 해, 그녀의 어머니는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고, 그녀는 황무지 같은 산속에 버려졌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다 지씨 가문의 짓이었다.

그때 사부님과 사모님이 그녀를 거두어 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흔적도 남지 않은 채 그 산속에서 조용히 죽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복수를 위해,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다시 경시로 돌아왔다.

정신을 가다듬은 지하린은 주머니에서 어젯밤 다친 남자에게서 가져온 펜던트를 꺼내 햇빛에 비춰보았다.

깨끗이 닦은 보석은 은은한 붉은 빛을 띄며 훨씬 더 투명하게 빛났고, 딱 봐도 가격이 어마어마해 보였다.

손에 착 달라붙는 묘한 감촉에 그녀는 그 펜던트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곧장 펜던트에 줄을 꿰어 목에 걸었고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예쁘네. 그냥 이렇게 하고 다니자.'

펜던트를 옷 안으로 숨긴 지하린은 휴대폰을 꺼내 IP 주소를 바꾼 후 바로 뉴스 앱을 열었다.

잠시 후, 화면에 뜬 큼직하고 굵은 제목이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지씨 가문의 큰딸 지소은 중태. 지씨 가문, 거액 내걸고 희귀 혈액 수소문!'

지하린은 흥미를 느낀 듯 그 기사를 클릭했다.

기사에 따르면, 지소은이 교통사고로 과다출혈로 패닉 상태에 빠졌는데 그녀의 혈액형은 RH 마이너스형이라는 희귀 혈액이라 병원 혈고에도 잔여가 많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지씨 가문은 고액의 사례금을 내걸고 헌혈자를 찾고 있지만, 지원자는 극히 드물었다.

지하린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번졌다.

'기막히게 좋은 타이밍이네.'

본래는 지씨 가문에 들어가기 위해 꽤 많은 수고가 필요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기회가 제 발로 찾아오다니.

휴대폰을 끈 후, 지하린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생각들을 정리했다.

RH 마이너스형. 분명 드문 혈액형이지만, 마침 그녀 또한 그 혈액형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단 하나 '신분'이었다. 경시에 발붙이고 계획을 실행해 나갈 수 있을 만큼 확실한, 흔들리지 않는 신분.

마음이 정리되자 지하린은 망설이지 않고 외투를 챙겨 들고 방을 나섰다.

지하린이 원하는 건 단순히 지씨 가문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지씨 가문이 애원하며 자신을 맞이하게 할 것이고, 세상에도 당당히 '지씨 가문의 큰 아가씨, 지하린'임을 알리게 할 것이다.

경시 제일병원. 지정우가 병원 앞에 막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순간, 누군가가 그의 앞길을 막아 섰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그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너..." 지정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했다.

지하린은 똑바로 그를 응시하며 입가를 살짝 올렸다.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지정우 씨? 아니면... 아버지?"

그 말은 마치 천둥이 내리친 것처럼, 지정우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눈을 떼지 못한 채 지하린을 바라봤고, 입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하린은 미동도 없이 그의 시선을 받아냈다.

지정우의 시선이 자신에게 오래 머물수록, 지하린의 마음속에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모습이 점점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지정우에게 조금이라도 양심이 남아 있다면, 지금쯤 죄책감에 고개도 들지 못했어야 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두 부녀는 한참을 침묵하며 서로 마주보기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지정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 정말 하린이냐...?

지하린은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친자확인이라도 하시겠어요?"

"아,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지정우는 눈가가 붉어지며 눈물을 삼켰다. "정말 네 어머니 젊었을 때랑 똑같이 생겼구나..."

그 말에 지하린은 저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몇 년 전에 지정우가 권세와 부를 좇기 위해 아내와 딸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녀의 어머니는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고 그녀도 10여년 동안 밖에서 헛돌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뻔뻔하게 엄마를 입에 올려?'

"제가 RH 마이너스형이에요."

그 말을 남긴 지하린은 뒤도 안 돌아보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놀라움이 앞섰던 지정우도 곧 정신을 차리고 급히 그녀를 따라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함께 중환자실 앞까지 걸음을 옮겼다.

지하린은 유리창 너머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병상에 누워 있는 한 소녀를 보았고, 그 소녀의 몸에는 각종 의료 기기와 튜브가 연결되어 있었다.

"제 피가 필요하다면 수혈해 드릴게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그녀는 유리창 너머를 다시 한번 바라보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지씨 가문의 당당한 큰 아가씨로 돌아갈 거예요. 그리고 지씨 가문은 저를 위해 성대한 환영 연회를 열어야 해요. 제 존재를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리는 자리로요."

지정우의 얼굴은 순간 난감해졌다. "하린아, 혹시 아직 거처가 없다면 부동산 하나를 사줄 수는 있어. 하지만 지씨 가문으로 돌아오는 건은 그건 좀..."

지정우는 말끝을 흐렸지만, 지하린은 이미 그 다음 말을 다 알고 있었다.

설령 그가 동의하더라도, 지씨 가문 사람들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지씨 가문에서 제 조건을 만족해줄 수 없다면, 저도 굳이 지소은을 살릴 이유가 없네요." 지하린은 말과 동시에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그러자 당황한 지정우는 급히 뒤따라가며 그녀를 붙잡았다. "잠깐만! 가지 마, 하린아. 아빠가 지금 당장 상의해 볼게..."

계속 읽으시겠어요?

이어서 읽으면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이어서 읽기

챕터 목록

총 188장

  1. 1장제1화 값진 목숨
  2. 2장제2화 아버지
  3. 3장제3화 돌아오자마자 재수 없어

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