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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그들은 미친 듯이 서로를 탐했다
화경 공항.
7년 만에 드디어 화국으로 돌아온 서윤아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귀국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짐이 가득 실린 카트를 밀고 있는 그녀의 옆에 키가 훤칠한 외국인 남자가 손에 든 캐리어를 카트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서윤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sage, 수고 많았어요."
서윤아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외국에서 지내는 몇 년 동안 고씨 가문은 그녀에게 한 푼도 보내지 않았다.
가장 형편이 어려웠을 때, 그녀는 농장에서 채소를 따고 공사장에서 벽돌을 나르며 근근이 버텨왔다. 그러고 보니 이런 짐 따위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외국인 남자는 빈손으로 그녀의 곁을 걸으며 휴대폰으로 이곳 저곳 사진을 찍어 댔다.
그들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수군거렸다.
"외국인한테 홀렸나? 왜 저렇게 외국인한테 아양을 떨지?"
"요즘 여자들은 외국인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린다니까. 지가 돈을 써가면서 외국인한테 들어붙으니 말이야."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고윤택은 악의적인 추측으로 가득 찬 수군거림을 들으며 문득 자신이 외국으로 내쫓은 어린 소녀를 떠올렸다.
'벌써 7년이 흘렀네. 그 아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혹시 저 여자처럼 외국인 노동자처럼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곧 그는 고개를 저으며 그런 생각을 접었다. 저 여자는 돈 때문에 저러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매달 서윤아에게 3만 달러의 생활비를 보내줬다. 한화로 환산하면 1년에 약 4억 원에 달하는 생활비를 빠짐없이 보내 줬다. 7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말이다.
소비가 높은 M국에서 지내더라도, 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잘 지낼 것이다.
고윤택이 그녀를 위해 신청한 대학은 학업 스트레스도 없었기에 그녀는 그저 무사히 졸업장만 받으면 되었다.
7년의 시간은 그녀가 성장하고 현명해지기에 충분한 세월이었다. 이제 그녀를 다시 데려올 때가 된 것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곁에 있는 화약 그룹의 대표 성요준을 돌아보며 물었다.
"M국에 있는 신예 약학 전문가인 sage를 화약 그룹에 영입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언제쯤 M국으로 출장 가실 겁니까?"
사흘 전, 화국의 국보급 과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 양원 원사인 조수평이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그와 관련된 국가 기관과 제약 회사들은 모두 큰 영향을 받았다.
그중 화약 그룹의 영향이 가장 컸다. 몇몇 약 연구 프로젝트는 이미 전면 중단된 상태였다.
지금 화약 그룹이 절실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약학 인재의 영입이었고, 그 프로젝트를 다시 가동시킬 적임자가 절박했다.
조수평의 제자인 sage는 화약 그룹에 영입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고윤택의 말을 들은 성요준은 천천히 휴대폰 게임에서 시선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왼쪽 귀에 있는 뱀 모양의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고 팀장님, sage는 팀장님이 접대하는 M국 조문단에 있습니다."
고윤택은 순간 깜짝 놀랐으나 곧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려 애를 썼다. 성요준은 평범한 사업가가 아니었다. 그는 강력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일은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궁금증을 참지 못한 고윤택은 다시 물었다 "sage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죠? 화국 사람인가요?"
그 질문에 성요준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화국 사람이라는 것만 알고 있어요. 아주 신비로운 인물이죠."
"일부 연구원들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sage처럼 기본 정보조차 알려지지 않은 경우는 극히 드물어요."
그때,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조문단이 도착했습니다."
성요준과 고윤택은 동시에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봤다. 다섯,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조문단은 모두 서양인이었다.
조문단의 대표인 곽원빈은 성요준을 발견하고 과장되게 두 팔을 벌려 포옹하려 했다.
성요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몸을 피한 뒤, 그와 간단히 악수를 나눴다.
조문단은 공식적인 접대를 받았다. 고윤택은 적절한 시기에 그들 곁으로 다가가 유창한 영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간단히 인사를 마친 뒤, 고윤택은 그들을 호텔로 안내하려 했다.
그때, 곽원빈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만요. 한 사람이 더 있습니다. 아, 왔네요."
'혹시 sage인가?' 고윤택과 성요준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조문단에 합류한 사람은 키가 훤칠한 동양 여성이었다. 청바지에 셔츠 차림인 그녀의 얼굴은 높이 쌓인 짐 더미에 가려 반쪽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직 검고 맑은 눈동자와 이쁜 이마만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바로 조금 전 행인들이 수군거렸던 짐을 밀고 간 여자였다.
고윤택이 다가가 그녀를 도우려는 찰나, 뒤에서 성요준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곽원빈 씨, 당신들의 손은 아직도 북미에서 목화나 따고 있는 겁니까?"
그의 영어 발음은 정확했고 문법도 흠잡을 데 없었으나, 곽원빈을 비롯한 서양인들은 도무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다양한 색깔의 눈동자가 부딪히며 성요준의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목화를 딴다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닌 것 같았다.
화국 사람들은 웃음을 참느라 미칠 지경이었다.
'역시 아시아 제약 회사의 대표답게 입만 열면 독설이 튀어나오는 군.'
그때, 짐으로 가득 찬 카트 뒤에서 낮고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자가 카트 뒤에서 살짝 걸어 나오며 말했다.
"여러분, 곽원빈 박사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건 제가 응당히 해야 할 일입니다."
'자청해서 한 일이라고? 역시 외국인한테 홀린 게 틀림없어.'
성요준은 그녀를 흘깃 쳐다보다가 곧바고 시선을 거뒀지만, 고윤택은 얼어붙은 듯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눈앞의 여자는 짙은 눈썹에 긴 속눈썹을 가지고 있었고, 웃을 때마다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며 입가에 보조개가 살짝 패였다.
'이 여자가… 윤아인 걸까?'
서윤아도 고윤택을 발견했다.
세월은 그의 잘생긴 얼굴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딱딱한 정장 재킷도 그의 온화하고 우아한 매력을 가릴 수 없었다.
서윤아의 가슴 한켠이 순간 시큰하게 저려 왔고, 갖가지 감정이 뒤엉켜 올랐다.
그날 밤, 서윤아는 고영교가 건넨 과일주를 마시고 3206호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 있는 사람은 고윤택이 아니라 그녀처럼 몸을 통제할 수 없는 낯선 남자였다.
어두운 방 안에서 서로의 얼굴은 흐릿하게 보였지만, 우월한 근육의 촉감은 손 아래에서 뜨겁게 타올랐고, 두 사람은 미친 듯이 서로를 탐했다.
그 후,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고모 고정음의 손바닥이 서윤아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인륜을 저버리고 염치도 모르는 년이라는 욕설이 그녀를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어 버렸다.
7년이 지났지만 서윤아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 자신은 피해자인데, 왜 고정음은 자신이 고윤택에게 약을 먹이고 강제로 몸을 탐한 것처럼 말하는 걸까?
갓 18살이 된 소녀는 하룻밤 사이에 친구와 가족, 그리고 순결마저 잃어 버렸다. 수능을 볼 자격마저 박탈 당한 채, 온갖 욕설을 들으며 외국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더 잔인한 일은 그녀가 외국에 도착하자마자 강도에게 습격 당해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작은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가 수단을 부린다고 생각한 작은 아버지는 오히려 그녀의 번호를 차단해 버렸다.
낯선 거리에서 홀로 남겨진 여자가 어떤 일을 겪을지는 뉴스에서도 많이 보도되었다. 약자는 항상 피해를 당하기 더 쉬운 법이다. 만약 두 명의 유학생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는 이미 길바닥에 쓰러져 시신으로 발견되었을지도 몰랐다.
왼쪽 소매를 세게 잡아당긴 서윤아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작은 아버지, 오랜만이에요."
처음의 충격이 가라앉은 후, 고윤택은 마음이 복잡해지고 머리에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의 목울대가 한번 움직이더니 낮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윤아야, 7년 동안 잘 지냈니?"
그 질문에 서윤아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잘 지내지 못했다고 말해야 할까?' 하지만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잘 지냈다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7년 동안, 길거리를 헤매거나 중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도, 서윤아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홀로 버텨야 했다.
7년 내내, 그녀에게는 단 한 통의 연락도 오지 않았다. 작은 아버지의 전화 한 통조차 그녀에게 너무나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어쩌면, 염치도 모르는 년이라는 욕설을 들었을 때, 그녀는 먼저 고씨 가문을 떠났어야 했다.
그랬다면 버림받고 쫓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친척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새끼 새처럼 비굴하게 연결되지 않는 번호를 수없이 눌러대며 희망에서 절망으로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본 고윤택은 예전처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자 서윤아는 짐을 챙기는 척하며 그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
고윤택의 손이 허공에 멈칫하더니 이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예전의 서윤아라면, 자신을 보자마자 품에 안겨 그동안의 서러움을 토해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고윤택과 선을 긋고 있었다. 아마 그를 원망하는 게 틀림없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고윤택은 18살의 소녀를 외국으로 내쫓았으니까 말이다. 의식주 걱정 없이 지내더라도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윤아는 계속해서 꾀병을 부리거나 도둑을 맞았다고 거짓말을 하며 돌아오겠다고 고집하지 않았을 것이다.
순간 고윤택의 마음이 쓰리고 아파왔다. 7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서윤아는 여전히 자신의 깊은 뜻을 알아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그녀의 짐을 들어주자 서윤아는 고윤택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작은 아버지, 난 먼저 일하러 가볼게요."
짐이 가득 실린 카트가 성요준의 곁을 지나갔다.
서윤아는 잘생긴 남자를 수없이 봐 왔지만, 고윤택은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고윤택의 온화하고 우아한 매력과는 전혀 달랐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깊은 눈매, 그리고 오뚝한 콧대까지, 한마디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공격형 미남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남자를 전혀 알지 못했다.
서윤아는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거둔 뒤 앞으로 걸어갔다.
성요준 또한 시선을 거두었고,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 달콤한 레몬 향이 그의 코끝을 스치더니 순식간에 그의 뇌를 자극했다.
무심한 눈동자가 순식간에 수축되더니, 그는 일반인보다 훨씬 예민한 코를 본능적으로 킁킁거렸다.
틀림없다. 레몬과 라벤더가 섞인 향에, 패출리와 용연향의 약초 향이 섞인 우디 베이스였다.
성요준은 다시 서윤아를 돌아봤다. 이 독특한 향기는 7년 전, 자신과 하룻밤을 보낸 여자와 똑같았다.
"잠깐만요."
챕터 목록
총 33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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