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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대역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어린 간호사는 비밀을 알아낸 듯 흥분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여자분이 주 선생님의 첫사랑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에요!"
"정말? 그렇게 무서운 주 선생님한테도 첫사랑이 있었어?"
"네, 사실이에요. 장 과장님이 직접 말씀하셨어요. 장 과장님과 주 선생님은 대학 동창이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강한별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
'그날 사무실에서 주강준이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본 이유가 있었네.'
강한별은 무심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내가 주강준이 이루지 못한 첫사랑과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구나.'
'첫사랑이라...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대역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병원을 나선 강한별은 곧바로 심씨 그룹 빌딩으로 향했다.
그녀가 운영하는 소주 자수 공방인 '산월기'는 심씨 그룹 산하에 속해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강한별은 비서 백윤아에게 최근 1년간의 자수 주문 내역을 모두 정리해 가져오라고 했다.
빽빽하게 적힌 데이터를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던 강한별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심진우와 관련된 고객이 무려 7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녀는 심진우의 그늘 아래 살았고, 덕분에 산월기의 자수 주문도 끊이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그녀는 이미 무감각해졌다.
이제 다시 돌이켜 보니 스튜디오는 여태껏 심진우의 도움을 받아 운영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심진우가 만들어 놓은 화려한 울타리 안에서 몇 번 날개를 퍼덕이고는, 스스로 날고 있다고 착각했던 셈이었다.
강한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윤아야, 앞으로 이 고객들은 네가 맡아. 신제품을 홍보할 필요도 없고, 협력 관계를 유지하려고 따로 공들일 필요도 없어."
백윤아는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한별 언니, 이 고객들은 우리 공방의 주요 고객이잖아요."
"괜찮아. 새로운 고객을 찾으면 돼."
강한별은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자수 도안을 품에 안고 인쇄실로 향했다.
디자인 부서에서는 주성미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심진우는 그녀의 곁에 다정하게 서 있었다.
심진우는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늘 주성미 씨가 정식으로 심씨 그룹 디자인 부서에 입사했으니, 다 같이 회식합시다. 제가 쏠게요."
그 말이 떨어지자 사무실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한별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몸을 돌려 스튜디오로 돌아가려 했지만, 눈치 빠른 동료가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
"한별 씨, 어디 가? 같이 가자."
강한별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난 저녁에 할 일이 있어서 못 가."
디자인 팀장 동은서는 강한별을 항상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강한별이 대체 뭐라고, 왜 그룹에서 독립적인 브랜드를 만들 수 있는 거지?'
그녀는 비웃으며 말했다. "모두가 가는데, 한별 씨만 안 가면 마치 우리가 한별 씨를 따돌리는 것 같잖아."
"산월기가 아무리 독립적인 브랜드라고 해도, 결국 디자인 부서에서 관리하는 건 맞잖아. 주 부장님은 앞으로 한별 씨의 상사인데, 최소한의 존중도 없는 거야?"
"은서 씨, 그렇게 말하지 마." 그때, 주성미가 앞으로 두 걸음 다가서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별 씨, 다른 사람들 말 듣지 말고 회식에 같이 가요."
"마침 자수 문양 디자인에 대해 한별 씨한테 배우고 싶었는데, 전문적인 일은 전문가한테 배우는 게 제일 좋잖아요."
주성미의 몇 마디에 강한별은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게다가 모두의 시선까지 쏠린 상황이라, 그녀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미색 바, VIP 룸.
심진우와 주성미는 룸 한가운데 앉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강한별은 구석에 홀로 앉아 눈앞에 놓인 탄산수를 무심하게 저었다. 시끄러운 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술잔이 몇 차례 오가고 양주도 몇 병 비우자 사람들은 한껏 들떠 게임을 하자며 떠들기 시작했다.
주성미가 곧바로 제안했다. "그럼 간단한 게임을 합시다. 카드 한 장씩 뽑아서 숫자가 제일 낮은 사람이 벌칙 받는 거 어때요?"
"좋아요, 좋아요. 재미 있을 것 같아요." 동은서가 바로 맞장구쳤다.
다른 사람들도 잇따라 찬성했다.
"주 부장님, 좀 봐주셔야 해요!"
게임이 시작되고 몇 번의 라운드가 지나자 어떤 사람들은 술 세 잔을 벌칙으로 마셨고, 어떤 사람들은 옆 테이블에 가서 연락처를 물어봐야 했다. 웃고 떠드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주성미는 카드 운이 좋아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심진우는 게임에 참여하지 않고 그녀의 곁에 앉아 차가운 눈빛으로 게임을 지켜봤다.
주성미가 그를 돌아볼 때마다 그는 담담하면서도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곧 새로운 라운드가 시작되고, 카드가 강한별의 앞에 놓였다.
"한별 씨, 이제 한별 씨 차례에요. 너무 무서워하지 마요. 그냥 재미로 하는 게임이니까요." 주성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강한별이 카드를 뒤집으려 할 때, 그녀의 옆에 앉은 동은서가 실수로 술잔을 건드렸고, 술 반 잔이 그대로 강한별의 몸에 쏟아졌다.
"어머!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동은서는 허둥지둥 휴지를 꺼내 강한별의 몸에 묻은 술을 닦아 주는 척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녀 앞을 가렸다.
그 바람에 아직 뒤집지 않은 카드도 시야에서 완전히 가려졌다.
그 순간 동은서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 틈에 손가락 사이에 숨겨 둔 카드로 강한별 앞에 놓인 카드를 재빨리 바꿔치기했다.
"괜찮아요."
강한별은 휴지를 뽑아 옷에 묻은 술 얼룩을 천천히 닦아냈다.
그녀는 이미 카드가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몇 번의 라운드를 돌았으니, 이제 좀 더 자극적인 게임을 해볼까?" 동은서가 흥분된 목소리로 제안했다.
사람들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자극적인 게임? 어떤 게임?"
동은서는 눈을 굴리며 악의 어린 시선으로 강한별을 한 번 훑어보고는 곧바로 주성미를 바라봤다.
주성미가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자 그녀는 목소리를 높여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제일 낮은 카드를 뽑은 사람이 우리 앞에서 스트립 댄스를 추는 건 어때?"
주위에서 곧바로 더욱 열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강한별은 당황하지 않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테이블 아래에 스페이드 K를 미리 숨겨놓았다.
그녀는 태연하게 스페이드 K로 카드를 바꿔치기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무심코 뒤쪽을 바라보다가 어두운 통로 쪽에 시선이 멈췄다.
낯익은 실루엣이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옆 테이블로 향하고 있었다.
하얀 셔츠 소매를 대충 걷어 올린 남자의 옆모습이 조명 아래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바로 주강준이었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다음 순간, 대담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손가락을 살짝 멈칫하더니 앞에 놓인 카드를 뒤집었다.
눈부신 하트 A였다.
"와, 하트 A야. 제일 낮은 카드잖아!"
"강한별 씨가 뽑은 거야?"
"내가 뭐라고 했어. 이렇게 특별한 벌칙은 예쁜 아가씨가 뽑힐 거라고 했잖아."
몇몇 남자 동료들은 흥분된 눈빛으로 강한별을 쳐다봤다.
심진우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입을 열어 말리지 않았다.
그는 강한별이 고개를 숙이고 애교를 부리며 잘못을 인정하기를 기다렸다.
그녀를 도와주는 건 심진우에게 말 한마디면 충분한 일이다.
주성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아름다운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녀는 강한별과 심진우의 관계를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결국 강한별은 심진우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주성미가 굳이 먼저 들춰내 봤자, 오히려 속이 좁은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강한별이 눈치가 있다면, 조용히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도 계속 버틴다면, 주성미에게 그녀를 괴롭힐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테이블 앞에 선 강한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하트 A를 꼭 움켜쥐었다.
동은서는 차갑게 비웃으며 재촉했다. "강한별 씨, 카드는 한별 씨가 직접 뽑은 거잖아. 왜? 설마 이제 와서 발뺌하려는 건 아니지?"
강한별은 카드를 내려놓고 원피스 칼라에 있는 단추를 천천히 풀었다.
첫 번째 단추가 풀리고, 곧이어 두 번째 단추까지 천천히 풀렸다.
공기 중에는 어느새 묘하게 들뜬 열기가 감돌았다.
강한별은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를 흘깃 쳐다보며 자신이 일어선 위치에서 그가 충분히 볼 수 있는지 확인했다.
그녀의 손끝은 멈추지 않고 단추를 풀며 천천히 옷을 벗었다.
이윽고 가슴 부위의 피부가 조금씩 드러났다.
심진우의 눈빛이 더욱 깊어지더니 마음속에 걷잡을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
'저 여자가 지금 제정신이야? 진짜로 계속 벗을 생각인가?' 심진우가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이었다.
"찰싹!"
옆 테이블에서 선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챕터 목록
총 9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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