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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초예현 POV:
나는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그의 다음 말이 무엇일지 알 수 없었다.
"하나 더 있습니다."
권천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우리 결혼은 계약 결혼이지만, 밖에서는 완벽한 부부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의 말은 예상했지만, 막상 들으니 낯설었다.
"사람들은 내가 재벌가의 사위가 되는 것을 원합니다. 당신은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분명히 내 질문을 미리 예상한 듯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완벽한 며느리를 원하죠."
"그런데 왜 하필 저인가요?"
나는 물었다.
"권천윤 씨는 저를 오랫동안 보지 않았나요. 제가 그렇게 완벽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 텐데요."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당신이 더 적합합니다."
"무슨 뜻이죠?"
"난 어릴 때부터 가족에게 결혼을 강요받았습니다. 어차피 사랑 없는 결혼을 해야 한다면,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과 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의 말은 논리적이었다.
권천윤다운 사고방식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어두워진 도시의 불빛들이 현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랑 없는 결혼은 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권천윤은 잠시 침묵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진지했다.
"하지만 결혼은 감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더 이상 그와 논쟁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였다.
"알겠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미묘한 안도감이 스쳤다.
"내일 오전 10시에 집 앞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잠깐만요! 저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나는 급하게 말했다.
"며칠 정도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3일 후 오전 10시. 그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휴대폰을 들고 연락처를 확인했다.
권천윤.
나는 그의 이름을 '내 남편'이라고 수정했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한범준에게서 완전히 벗어나는 첫걸음.
나는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한범준은 여전히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였다.
그는 공세희의 병간호를 핑계로 집을 비웠다.
나는 더 이상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에 대한 미련은 이미 바닥났다.
나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결혼식 청첩장 모조리 회수해 줘."
친구들은 놀라서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너 청첩장 디자인 직접 만들었잖아!"
"그게 어때서? 그냥 다 버려줘."
나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들은 내 말에 당황한 듯했다.
'초예현이 한범준을 버리다니.'
아무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내가 얼마나 한범준에게 헌신했는지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들의 반응을 이해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변했다.
아니, 변해야만 했다.
나는 내일 청첩장을 회수하러 가는 친구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할 생각이었다.
'내 결혼 상대가 바뀌었다고. 그것도 엄청난 재벌이라고.'
그들은 분명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런 시선에 연연하지 않았다.
나는 오직 내 앞날만 생각했다.
그날 저녁, 한범준이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옷차림은 깔끔했다.
그는 공세희의 병실에서 곧장 온 듯했다.
"예현아, 내가 할 말이 있어."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우리 결혼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감정 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공세희 씨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어."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그래서, 당분간은 공세희 씨 곁에 있어줘야 할 것 같아."
그는 내 반응을 살피는 듯했다.
내가 평소처럼 화를 내거나 울기를 바랐겠지.
하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초예현 씨는 알겠지만, 공세희 씨는 지금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 내가 그녀의 곁을 지켜줘야 해."
그는 변명처럼 들리는 말을 덧붙였다.
"네가 날 이해해 줄 거라고 믿어."
나는 그를 향해 차갑게 웃었다.
"그래서요? 제가 뭘 해드려야 하죠?"
내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내 반응에 당황한 듯했다.
"예현아, 네가 이해해주면 좋겠다."
"제가 뭘 이해해야 하죠? 당신이 다른 여자에게 가는 걸 이해하라는 건가요?"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한테 뭘 원하는 거죠, 한범준 씨?"
그는 다시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내가 뭘 원하냐니…."
그는 말을 더듬었다.
"그냥 네가 날 이해해주고 기다려주면…."
"기다리요? 뭘요?"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당신이 공세희 씨와 결혼해서 기업을 물려받고, 그 후에 저에게 돌아오라는 말인가요?"
내 말에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예현아, 그게 아니…."
"그래서요? 저보고 그분 장례식에 참석해달라고요?"
내가 물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요?"
나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아버님 장례식은 내일모레야. 네가… 혹시라도 얼굴을 비춰준다면…."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제가 왜요?"
내 질문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아직도 그를 사랑한다고 착각했다.
내가 그의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침묵했다.
그는 내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예현아, 아버님은 너를 참 좋아하셨어."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네 디자인 감각을 칭찬하셨고, 너를 참 예뻐하셨어."
나는 그제야 생각에 잠겼다.
공세희의 아버지는 내게 잘해주셨다.
몇 번의 만남이었지만, 그는 내게 진심으로 호의를 보였다.
그의 죽음은 내게도 슬픔이었다.
하지만 그 슬픔은 한범준에 대한 배신감에 가려져 있었다.
'내가 그분께 작별 인사는 드려야겠지.'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참석하죠."
내 대답에 한범준의 얼굴에 희미한 안도감이 스쳤다.
"고마워, 예현아."
그 순간, 나는 그의 눈에서 비로소 진심을 보았다.
하지만 그 진심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공세희를 위해 나를 이용하려 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이용당하기로 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옷장으로 가 가장 단정한 검은색 원피스를 꺼냈다.
"같이 가죠."
내 말에 한범준은 놀란 듯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말없이 집을 나섰다.
어색한 침묵이 우리를 감쌌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끝나면, 나는 더 이상 그의 그림자가 아니게 될 테니까.
나는 새로운 시작을 꿈꿨다.
한범준은 내게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주었다.
그것이 그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나는 내일 공세희의 아버지 장례식에서, 한범준과 완벽하게 헤어질 것이다.
그리고 권천윤이라는 새로운 남자와 함께, 내 인생의 다음 챕터를 시작할 것이다.
챕터 목록
총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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