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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미약에 취한 남자

자리에 멈춰선 진어멈은 낯선 윤여정에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운여정은 최대한 태연한 척했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전해지는 불안감은 멈출 줄 몰랐다

전생에 겪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가 마치 딴 세상에 온 것처럼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진정한 회안후부의 아가씨는 그녀였으나, 유모가 아기를 바꾸는 바람에 수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회안후부로 돌아온 후, 후부의 가짜 딸이자 저택의 큰 아가씨라고 불리는 운선영은 사사건건 이간질하고 방해를 일삼았다. 결국 후부의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사게 된 그녀는 모진 수난을 겪다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오늘도 마찬가로 운선영은 꽃을 보내온다는 핑계를 대며 운여정을 끌고 함께 연못에 빠뜨렸다.

운선영의 수단이 어찌나 치밀하고 교묘했는지, 사람들 눈에는 운여정이 그녀를 연못에 밀어 넣은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오해의 시작은 운여정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즉 나락으로 떨어지는 첫 시작이 되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운선영, 그리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들.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운여정의 안색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발견한 어멈은 그녀가 후부인을 두려워한다고 오해하고는 조용히 타일렀다. "아가씨, 이미 결정하신 일이니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노비도 향단 계집이 하극상을 저질렀다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노부인은 아가씨의 편에 설 것이옵니다, 하면 부인도 어쩌지 못할 겁니다."

증오를 억누르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운여정은 진어멈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어멈, 고맙네."

그리고 빠르게 재촉했다. "잔치에 참석해야 하니, 어멈이 날 위해 옷을 골라 줄 수 있겠는가?"

진어멈은 난처한 얼굴로 장롱을 돌아봤다.

운여정은 진어멈이 난처해할 줄 미리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가 다음을 위해 일부러 진어멈에게 던져준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후부에 돌아온 지 달포도 지나지 않은 데다, 저택에 있는 사람 모두가 운선영의 기분을 살폈기에 아무도 그녀를 위해 적당한 옷을 준비해 주지 않았다.

며칠 전에 급하게 맞춘 옷도 방금 연못에 빠져 흙이 묻은 바람에 더는 입을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장롱에 남은 옷가지는 전부 운선영이 버린 옷으로 가득 쌓여 있었다.

"차라리..." 진어멈은 난처한 기색으로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차라리 아프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는 건 어떠합니까? 아가씨가 연못에 빠지는 모습을 노비들도 지켜봤으니 이해할 겁니다."

"오늘은 할머니 생신 잔치인 데다, 내가 후부의 가족 신분으로 처음 사람들 앞에 나서는 자리일세." 운여정은 태연한 얼굴로 장롱 앞에 서서 옷을 뒤적거렸다.

"만약 내가 참석하지 않으면 불효녀라고 손가락질을 받겠지."

처음 얼굴을 알리는 자리는 아주 중요하다.

전생에 연못에 빠져 잔치에 참석하지 않은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엄청난 오해를 받아 결국 후부에서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줄곧 운여정의 곁에서 시중을 든 진어멈은 그녀의 장롱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운여정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진어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처소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노비 새 옷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창가 곁에 놓인 의자에 앉은 운여정은 진어멈이 빠른 걸음으로 별원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생각을 끝마칠 때쯤, 별원 뒤편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고요한 별원에서는 유독 섬뜩하게 들렸다.

유수각에 향단 계집과 진어멈을 제외하고 어린 종놈은 대청에 불려 가 일손을 돕고 있기에, 요란한 소리는 분명 심상치 않았다.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운여정은 탁자 위에 올려둔 주전자를 무기로 삼아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병풍을 돌기도 전에 싸늘한 기운이 스치더니, 그녀가 반응할 새도 없이 목덜미에 날카로운 비수가 겨눠졌다.

"움직이지 마." 운여정의 뒤에서 들려오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분명한 살기가 느껴졌다.

목덜미에서 전해지는 싸늘한 감촉에 몸을 흠칫 떤 운여정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그녀의 뒤에 선 사람은 대답 대신 비수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남자의 숨결이 운여정의 귀에 닿을 때마다, 시리도록 차가운 공기와 더불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열기가 동시에 전해졌다.

전생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운여정은 왜 갑자기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말을 하려던 순간, 코끝에 비릿한 피 냄새가 전해졌다.

어렴풋이 짐작한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다친 것도 모자라 독에 중독되었습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운여정의 등에 몸을 기대고 선 남자의 몸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고 뜨겁고 단단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일찍이 시골에서 지내는 동안 운여정은 스승을 따라 의술을 배운 적 있다. 두 사람의 몸이 점점 더 가까이 붙을수록 보이는 남자의 반응에서 그녀는 바로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동시에 오싹한 느낌이 발 밑에서부터 전해졌다.

유수각에는 그녀 혼자만 남게 되었고, 그녀의 뒤에는 미약에 취한 데다 무공이 뛰어난 남자가 있다.

손에 쥔 주전자를 더욱 세게 움켜쥔 운여정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쳤다. 이판사판 목숨을 걸고 싸우려던 그때, 목에 겨눠졌던 비수가 사라졌다.

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바로 뒤돌아선 운여정은 잔뜩 경계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며 뒷걸음질 쳤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검은색 장포에 얼굴도 검은 복면으로 감싸고 있어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밖에 드러난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을 옮겨 담은 것처럼 빛났지만, 빨갛게 물든 눈동자와 눈언저리에 몽롱한 안개가 깔린 듯한 눈빛은 욕망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운여정은 귀찮은 일에 간섭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더욱이 처소에 낯선 남자가 나타난 것도 모자라 미약에 걸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녀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녀가 조용히 자리를 떠나려 할 때, 남자의 소매에 붉은빛이 감도는 까마귀 깃털 모양이 수놓아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자수 무늬는 그녀가 전생에도 본 적 있는 무늬다. 바로 황실의 황손 목세곤 특유의 문양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운여정은 당장에 앞으로 다가가 두려움을 무릅쓰고 남자의 얼굴을 덮고 있는 두건을 확 아래로 잡아당겼다.

맑고 깨끗한 얼굴에 날렵한 미간과 우뚝 솟은 콧날. 가만히 누워있는 모습에서도 압도적인 기세가 흘러나왔다.

눈꼬리에 약간 묻어난 욕정에 날카로움이 다소 무뎌지긴 했지만 여전히 인상적인 이목구비였다.

약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참을 수 없는 분노 때문인지, 입술을 꽉 깨문 그의 얼굴에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윤여정이 자신의 복면을 벗겨 자신의 정체가 들어 났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그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진짜 목세곤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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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목록

총 185장

  1. 1장제1화 새롭게 태어나다
  2. 2장제2화 미약에 취한 남자
  3. 3장제3화 물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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