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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갑자기 나타난 친오빠

"사과 안 해."

진나연은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몸 양옆으로 늘어뜨린 두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두 눈만은 고집스럽게 두 사람을 향해 있었다.

"난 밀지 않았어. 배서현이 혼자서 넘어진 건데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해?"

"주혁 씨, 진 아가씨를 탓하지 마세요..."

배서현이 곽주혁의 셔츠 자락을 붙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해서 그래요. 제 다리는 원래 망가져서 쓸모없는 짐이나 다름없어요.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이렇게 힘들 줄이야... 진 아가씨랑은 상관없는 일이니 사과하라고 다그치지 마세요. 두 사람이 또 말다툼 하게 될까 봐 걱정돼요..."

한 발 물러서는 척하며 상대를 몰아붙이는 그 말들은 하나하나 곽주혁의 속을 날카롭게 긁었다.

배서현의 다리는 그를 구하려다 다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곽주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에 주변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했다. 고개를 들어 진나연을 바라본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실망과 혐오감이 가득했다.

"진나연, 넌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얼음장 같은 칼날이 되어 인정사정없이 날아와 진나연의 가슴에 박혔다.

"넌 3년 전과 똑같이 뻔뻔하기 짝이 없어. 잘못을 저지르고도 죽어도 인정할 줄을 모르지!"

그 말에 진나연은 숨을 헙 들이마셨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그녀의 심장을 무자비하게 움켜쥐고 비틀어대는 듯, 숨쉬기조차 힘들 만큼 가슴이 조여 왔다.

결혼한 지 3년, 짝사랑까지 10년이나 해왔다.

알고 보니 곽주혁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그저 음흉하고 악독하며, 죽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그런 막되먹은 여자에 불과했다

배서현은 곽주혁의 품에 기댄 채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나 곽주혁의 시야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배서현의 입가에는 은밀하고도 교활한 승리의 냉소가 번졌다.

'이런 별 볼 일 없는 멍청한 게, 감히 곽 사모님의 자리를 넘봐?'

"쾅!"

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어머니 서미옥이 캐리어를 끌고 나오다 곽주혁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배서현의 모습을 보고는 불같이 화를 냈다.

"이런, 진나연! 이 재수 없는 것!"

서미옥은 진나연의 코앞에 손가락을 들이대며 악을 썼다. "서현이는 우리 주혁이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다. 오늘 처음 만난 애한테 어떻게 이렇게 심한 짓을 저지를 수가 있니? 넌 심보가 왜 그렇게 못돼 처먹었니! 그러니 옛날에 파렴치하게 주혁이의 침대에 기어들어 가는 천박한 짓을 저질러서 억지로 결혼까지 했겠지!"

"어머니, 그만하세요." 곽주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침대에 기어들어 갔다'는 말은 진나연의 마지막 자존심을 건드렸다.

"전 그 사람의 침대에 기어들어 가지 않았어요!" 진나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새빨개진 눈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는 곽주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해명할게. 3년 전 그날 밤, 누군가 내 물에 약을 탔어! 난 그 방에 당신이 있는 줄도 몰랐고, 그런 방식으로 당신과 결혼할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 없다고!"

"됐어!"

곽주혁이 날카롭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눈에는 더할 나위 없는 짜증과 지겨움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진나연, 누군가 약을 탔다는 그 변명은 3년 전에 이미 질리도록 들었어." 그는 마치 발악하는 광대를 보듯 차가운 시선으로 진나연을 노려보았다. "이제 와서 지난 일을 다시 들추는 건, 널 더 역겹게 만들 뿐이야."

그 말에 진나연의 온몸이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가 발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치솟아 올라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마저 산산조각 냈다.

그렇다, 그는 믿지 않았다.

10년간의 죽마고우라는 인연도 결국 다른 사람의 몇 마디 말보다 못했다.

"아직도 멍하니 거기 서서 뭘 하는 거니?!"

서미옥은 곽주혁이 화를 내자 이때다 싶어 들고 있던 캐리어를 진나연에게 힘껏 내던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캐리어가 진나연의 종아리에 부딪혔다. 그녀는 휘청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고, 캐리어 안에서 낡은 옷가지 몇 개가 쏟아져 나와 처량함을 더했다.

곧이어 서미옥이 경멸 가득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이혼 서류에 서명했으니 네 그 거지 같은 짐이나 챙겨서 당장 곽씨 가문에서 꺼져! 여기서 우리 집의 바닥을 더럽히지 말고!"

진나연은 바닥에 널브러진 낡은 옷가지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곧게 펴며 시선은 서미옥을 스쳐 곽주혁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에 멎었다.

마음이 식어버리니 더는 슬플 것도 없었다.

"곽주혁, 똑똑히 기억해."

진나연의 말투는 어떤 파문도 일지 않는 죽은 물웅덩이처럼 더없이 평온해졌다.

"하지 않은 일에 대해 나 진나연은 영원히 인정하지 않아. 이번 생에 당신에게도, 저 여자에게도 절대 사과할 일 없을 거야."

말을 마친 그녀는 바닥의 옷을 줍지 않고 해져서 색이 바랜 캔버스 가방을 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아래층으로 향했다.

곽주혁은 그녀의 단호한 뒷모습을 보며 심장이 이유 없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고, 말로 설명하기 힘든 짜증이 속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별장 대문 밖.

서늘한 밤바람이 불고 있었다.

진나연이 대문을 나서자마자 곽씨 가문의 널찍한 저택 진입로에 검은색 롤스로이스 팬텀 한 줄이 가지런히 정차해 있는 것이 보였다.

곽씨 가문이 전성기를 누릴 때도 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위세였다.

그 중 가장 중앙에 자리한 차량의 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그림자가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나연아!" 양어머니 임향화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가로등 불빛 아래 진나연의 창백한 얼굴과 붉어진 눈가를 확인한 임향화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곽씨 가문 그 개자식들이 너한테 또 무슨 짓을 한 거니?!"

임향화는 이를 갈며 곽씨 빌라 안으로 뛰어 들어갈 기세였다. "저것들이 미쳤나, 정말 이 임향화의 딸이 만만해 보여! 오늘 내가 들어가서 서미옥 그 노망난 여편네의 주둥아리를 찢어놓고 말겠어!"

"엄마, 가지 마세요!"

진나연은 황급히 임향화의 손목을 붙잡고 코끝의 시큰거림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이미 곽주혁이랑 이혼 서류에 사인했어요." 진나연이 깊은 피로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저랑 곽씨 가문은 아무런 관련도 없어요. 엄마, 더는 저 사람들 때문에 화내지 마세요. 그럴 가치도 없어요."

그녀는 양어머니가 자신 때문에 더는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곽씨 가문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임향화는 '이혼'이라는 말에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큰 소리로 말했다. "잘했어! 사람 볼 줄도 모르는 그런 개자식은 우리 보물 같은 딸한테 과분하지!"

진나연은 대꾸 없이 임향화 뒤편에 늘어선 최고급 승용차 행렬로 시선을 돌렸다.

"엄마, 근데 이 차들은 다 뭐예요? 아까 전화에서는 친오빠가 찾아왔다고 하셨잖아요?"

그녀는 어릴 적 임향화에게 입양된 고아였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무 소식 없다가 어떻게 갑자기 친오빠가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 위세를 보아하니 상대의 배경이 보통이 아닌 듯했다.

임향화는 진나연의 손을 마주 잡고 한숨을 쉬며 그녀를 차 쪽으로 이끌었다.

"여기서 얘기할 게 아니야. 일단 엄마랑 차에 타자. 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차에 타서 천천히 얘기해 줄게."

진나연은 의문이 가득했지만, 순순히 임향화를 따라 롤스로이스 뒷좌석에 올랐다.

바로 차 문이 닫히기 직전,

빌라 대문이 열리더니 배서현을 방에 데려다 준 곽주혁이 어머니 서미옥을 따라 나왔다.

서미옥은 진나연이 후회하고 돌아올까 봐 경비원에게 다시는 들여보내지 말라고 이르러 나온 참이었다.

하지만 문을 나서자마자 진나연과 임향화가 번호판이 '00001'인 롤스로이스에 올라타는 것을 목격했다.

차 문이 '쾅' 하고 닫히고, 차량 행렬은 위풍당당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미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오늘따라 왜 저렇게 순순히 이혼 서류에 서명하나 했더니, 벌써 갈아탈 남자를 구해놨던 거구나!"

서미옥은 냉소를 터뜨리며 곽주혁을 돌아보았다. "주혁아, 봐라. 임향화 저 여자는 가사도우미 노릇을 하더니, 몇 년이 지나도 딸을 팔아서 부귀영화 누리려는 그 천박한 버릇을 못 고쳤어! 분명 진나연 저년을 또 어느 돈 많은 늙은이한테 노리개로 팔아넘긴 게 틀림없어. 정말 그 어미에 그 딸이라더니, 역겨워 죽겠네!"

곽주혁은 멀어져 가는 호화로운 차량 행렬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얼굴이 극도로 험악해졌다.

저건 평범한 롤스로이스가 아니었다.

저 번호판이 상징하는 권세는 지금의 곽씨 가문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

'진나연, 대체 누구와 엮인 거지?'

귓가에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어머니의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곽주혁의 마음속에서는 정체 모를 불길이 점점 더 거세게 타올랐다.

"그만하세요!" 곽주혁이 갑자기 싸늘하게 소리쳤다.

아들에게 호통을 들은 서미옥은 어이없고 서운한 얼굴로 멈칫했다. "왜 나한테 화를 내고 그래?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곽주혁은 어머니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빌라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 자리에 홀로 남겨진 서미옥은 분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한편.

2층 발코니 커튼 뒤에 서 있던 배서현은 차량 행렬이 사라진 방향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진나연이 차에 오르는 순간, 차 안의 센서등이 켜졌다.

배서현은 뒷좌석에 다른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을 어렴풋이 보았다.

그 남자의 옆얼굴은 깊고 날카로운 윤곽을 지녔고, 상위 포식자 특유의 살벌하고 과감한 기세가 느껴졌다. 마치 멀리 운성에 있는 자신의 큰오빠, 배진영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떠오르자마자 배서현 스스로에 의해 억눌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배씨 가문은 운성에 있다.

게다가 큰오빠 배진영은 이 도시에 와본 적도 없었다.

가사도우미의 손에 자란 진나연 같은 천한 것이 감히 배씨 가문의 신발이나 들 자격이라도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인물과 엮일 수 있겠는가?

"분명 내가 잘못 본 걸 거야...."

배서현은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다시금 의기양양한 미소가 걸렸다.

'누구 차에 탔든 무슨 상관이람. 눈엣가시 같던 진나연만 사라졌으면 곽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는 결국 나 배서현의 것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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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목록

총 151장

  1. 1장제1화 이혼 합의서
  2. 2장제2화 갑자기 나타난 친오빠
  3. 3장제3화 겁먹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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