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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타

"이대표님,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인생은 와인을 음미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어떤 와인은 한번 맛을 본 걸로 충분하기에 다시 맛을 볼 필요가 없죠. 그리고 중요한 건, 전 지금 마시는 와인에 만족하고 있어요."

임하늘은 잔을 들어 올리며 공손하게 미소 지었지만, 차분한 눈빛 뒤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서준의 얼굴이 즉시 어두워졌다.

그는 임하늘에게서 시선을 떼더니 와인잔을 집어 들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5년 전, 그녀가 그가 건넨 1억을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단호하게 떠났던 날처럼 그녀의 '이대표님' 이라는 호칭은 그 어떤 욕설보다도 그의 심장을 더욱 아프게 찔렀다.

방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고, 공기가 차갑게 식어갔다.

한 켠에 앉아 있던 장팀장은 이서준과 정성훈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임하늘 씨,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와 함께 식사라도 하고 가요. 이대표님과 이야기도 좀 나누고."

장팀장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이서준의 옆자리로 이끌었다.

"그냥 가볍게 식사하고 담소만 나누는 자리예요. 약혼자가 그것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방송국에서 어떻게 일할 수 있겠어요? 자, 이대표님과 술 한 잔 마셔요. 술 한 잔 마시고 가요."

장팀장은 그녀의 잔에 독한 양주를 가득 따랐다.

임하늘은 떨리는 손으로 잔을 들어 올리더니 그를 향해 내밀었다.

"이대표님, 제 술을 한잔 받아 주시죠."

그녀가 말을 마치자 마자. 그는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단숨에 들이켰다.

손끝이 스치는 순간, 임하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찰나의 접촉이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감정이 꿈틀거렸고 그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하나 둘씩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가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였다. 그녀는 학교에서 진행하는 경연에 참가하여 매일 같이 연구에 매진했던 터라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 끝내 위병으로 병원에 실려가게 되었고 그 뒤로 서이준은 직접 그녀의 하루 세끼를 챙겼다. 매운 음식은 물론이고 술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헤어진 지 5년이나 지난 지금. 그는 그녀의 잔을 빼앗아 안에 든 술을 단번에 마셔 버린 것이다.

임하늘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길고 마디마디가 분명한 손가락이 와인 잔을 감싸고 있었고, 차분한 얼굴에 진지한 기색이 비쳤다.

눈빛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고 그의 절제된 동작 하나하나에는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듯한 매력이 숨겨져 있었다.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지만 마치 독약마냥 치명적이었고 사람 마음을 홀렸다.

그녀는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어 자신의 잔에 다시 술을 따르고는 대범하게 입을 열었다.

"이대표님, 그럼 이 잔은 제가 마실게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젖히더니 술을 단번에 마셔버렸고 술잔을 빼앗으려고 내 뻗은 이서준의 팔은 허공에 멈췄다.

임하늘은 그의 손을 보지 못한 척했다.

그와 다시 얽히는 것은 그녀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고, 그의 도움을 받는다면 왠지 빚을 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품었던 애틋한 감정은 5년 전에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의 습관적인 동작 하나에 마음이 흔들릴 만큼 그녀는 여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서준이 그녀 따위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권력과 특권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5년 전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강서은과 정성훈은 서로에게 키스하고 애무하며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행동했다.

임하늘은 남들이 이 자리에 계속 남아 있는 게 눈치가 보였다. 마치 자신이 남들의 애정행각을 방해하는 사람 같았던 것이다.

이서준이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임하늘은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장팀장은 이번에는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계약을 성사 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계약만 성사된다면 그 계약을 따낸 사람이 강서은이든 임하늘이든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막 술집에서 나왔을 때, 휴대폰이 울렸고 그녀는 멈춰 서서 문자를 확인했다.

[1년치 후원을 원한다면, 문 앞에서 기다려.]

오만하고 독단적인 말투는 딱 봐도 이서준이었다. 아니면 그냥 스팸 문자라고 생각하고 지워버렸을 것이다.

초여름 날씨는 그리 덥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늘은 변덕이 심했고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임하늘은 급히 건물 밑에 들어가 소나기를 피했다. 고개를 숙여 비에 젖은 하이힐과 스타킹을 바라보던 임하늘은 갑자기 아까 이서준과 나눴던 대화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고급 세단 한대가 멀지 않은 곳에 정차하더니 창문이 천천히 내려갔다.

이어 눈부실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나타났고 그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타."

짧고 차가운 명령, 역시나 이서준 다웠다.

임하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5년만에 만나는 그였지만 여전히 예전처럼 하인을 다루듯 그녀에게 명령했다.

임하늘이 우산 대신 핸드백을 머리 위에 올리고 차로 뛰어가려던 그때, 우산을 든 기사가 차에서 내려 그녀를 차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서준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임하늘을 바라 봤다.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의 빗물에 젖은 긴 다리와 하이힐에 향했고 살색 스타킹 너머 그녀의 피부가 얼핏 보였다.

그는 말없이 수건을 꺼내 그녀의 다리의 물기를 닦아 주었다.

갑작스런 그의 스킨십에 임하늘은 깜짝 놀라 온몸이 굳었다.

그녀는 다급히 그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아 들고는 예의 바르게 감사를 전했다.

그녀가 일부러 그와 거리를 두는 모습은 마치 그에게 둘은 이미 끝난 사이라는 걸 상기시켜 주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창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이윽고 그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혼 날짜는 정했어?"

임하늘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차가 많이 막혔다. 기사는 천천히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침묵 속, 이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남자는 너한테 잘해줘?"

임하늘이 잠시 갈등하더니 입을 열었다.

"네."

"얼마나 잘해주는데?"

"이대표님, 그 사람 눈엔 저밖에 없어요. 변함없이 저를 사랑하고 아껴줘요, 날 버리고 떠난 적도 없고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기에는 약혼자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그를 향한 비난이었다.

그는 무심하게 차문을 두드리던 손을 거두고 주먹을 쥐었다.

이어 차 안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고 어느새 비가 그쳤다.

임하늘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등과 건물을 바라봤다.

그의 상황은 아예 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5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대단한 집안의 귀한 도련님이었고 월급이 500만원 남짓한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고급 세단은 임하늘이 힘들게 돈을 모아 겨우 장만한 작은 아파트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그가 어떻게 자신의 전화 번호와 주소를 알아냈는지 묻지 않았다. 그와 같은 사람들에겐 그냥 사소한 일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녀가 문을 열려던 그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IT업계를 그만두고 방송국에 취직한 거야?"

그녀가 수석으로 컴퓨터 공학과를 졸업했음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임하늘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이대표님, 저는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IT업계가 저를 버렸으니 저는 미련 없이 포기하고 적성에 맞는 일을 다시 찾은 거죠."

그녀의 말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 있었다.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이서준은 급히 그녀를 불렀다. 임하늘이 멈춰섰으나 정작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하늘은 몸을 살짝 숙이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 대표님, 대표님 말대로 저희는 다시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녀는 이서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문을 닫더니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떠났다.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에 꽉 쥐어져 있던 이서준의 주먹이 힘없이 풀렸다.

그녀는 5년 전과 마찬가지로 차갑고 단호하게 그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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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목록

총 113장

  1. 1장제1화 우연
  2. 2장제2화 타
  3. 3장제3화 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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